▲설창고개에서 학살된 김정태(사진제공: 김광호)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1어온 이는 이석흠이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위원장님 오셨는교." "지서장님도 잘 지내셨지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이들은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라며 이석흠이 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오늘 안건은 모두들 알고 있듯이 창고에 구금되어 있는 빨갱이들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타 면 사람들도 있느니만치 심사를 함에 있어 신중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남 김해군 진영읍, 진례면, 대산면(현재는 창원시에 편입) 보도연맹원들과 예비검속자 500여 명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진영읍 김광진씨 창고에 구금되었다.
500명을 하루에 심사하려니, 그들의 이력을 정확하게 알고 심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참석자 중 한 명이라도 심사 대상자를 '빨갱이'로 지목하면 그는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심사대상자는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C, D 등급은 석방, A, B 등급은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가야 했다.
"다음은 김정태입니다." 모두들 침묵했다. 김정태는 참석자들이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이야기하기에 껄끄러운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읍장 강백수가 침묵을 깼다. "김정태는 악질 공산주의자입니다. 그 자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김정태를 죽여야 한다는 강백수의 주장에 참석자들은 그의 사감이 개입된 것을 눈치챘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물론 김정태가 '왜 악질 공산주의자'인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소위 비상시국대책위원회 회의 구성원 중 한 명인 강백수가 강력하게 주장했기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참석자 모두가 김정태가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지역의 유력자이자 자신들의 감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인물이었기에, 김정태를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자는 심산이 작용했다.
1950년 7월 중순 경북 김해군 진영읍사무소 2층에서 열린 비상시국대책위원회 회의 결과, 김정태를 비롯한 300명은 학살 대상이 되었고, 200명은 석방되었다. 진영읍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300명은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진영에서 김해 가는 방향의 설창고개에서 학살되었고, 시신은 나밭고개에 버려졌다.
300명을 학살터로 내몬 이날 회의 참석자는 시국대책위 위원장이자 진영 '국민회' 부위원장이던 이석흠, 읍장 김윤석, 부읍장 강백수, 지서장 김병희, 청년방위대장 강백수, 의용경찰 강치순이었다(김기진, 『국민보도연맹』). 그렇다면 강백수는 김정태와 어떤 악연이 있었기에 그를 '악질 공산주의자'로 지목했을까?
초등학생 여제자를 성폭행한 교사
"네, 진영운수입니더. 네. 이삿짐 나르신다구요?" 전화를 받는 총무 이춘길(가명) 옆에 있던 사장 김정태가 '누구'냐고 묻자,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이춘길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강백수라예"라고 대답했다.
순간 얼굴이 붉어진 김정태가 "됐고마. 일 없다 캐라"라고 했고 이 총무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말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김정태는 "어디 일본 놈의 개가 여기다 전화를 하는고!"라며 화를 냈다.
김정태가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무얼까? 손자 김광호 증언에 의하면, 강백수는 진영의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여제자를 성폭행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 그가 마산에서 살다가 얼마 후 다시 진영으로 이사 오려 했다. 그런데 진영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김정태는 이삿짐을 날라 달라는 강백수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하여 강백수는 김정태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김정태가 강백수을 인간 백정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탓이었다. 김정태(1900년생)는 1919년 3월 31일 있었던 진영장터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이후 그는 일제경찰에 검거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그는 석방 후에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요시찰인물로 찍힌 김정태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았다. 아들 김영욱(1923년생)도 아버지의 전력으로 인해 요시찰인물이 되었다. 김영욱이 일본 와세다대학 어학부에 진학했을 때, 그는 매주 토요일 12시까지 동경 경시청으로 가 '활동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경찰서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경찰에게 뺨을 수없이 맞았다. 하숙집 주인도 경찰에게 매수돼 김영욱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고자질했다. 이러다 보니 김영욱의 뺨은 '일본 경찰에게 내놓은 뺨'이 되었다.
해방 후 좌와 우는 분열되어 극심히 대립했다. 1946년 3.1절 기념식을 좌와 우는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따로 열었고,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촉성국민회 주도의 3.1절 기념식에 초대를 받은 김정태는 참석하지 않았고 이 일로 민족반역세력에게 미움을 샀다.
신원확인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유해
"어이, 거기 조심하소." "네." 유해 발굴 현장 인부들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이 했고, 옷은 홍건하게 젖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라, 인부 10여 명은 성심성의껏 일했다.
현장에는 유족들 수백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혹시나 10년 전에 학살된 자신의 가족들을 찾을까 해서다. 어차피 살은 썩은 지 오래되어 식별이 불가능했기에, 유품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족들의 눈은 한시도 발굴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그 금이빨이 나왔심더." "예!" 가장 놀란 것은 유해 발굴을 총진두지휘하던 김영욱이었다. "시방 뭐라 그랬능교?" "여그 두개골 치아 부분에 금이빨이 있슴더." 김영욱은 금이빨이 박혀 있는 두개골 가까이 갔다. "아이고, 아버님!" 한참 동안 곡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김영욱은 신중했다. 혹시나 금이빨을 한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돌아가신 분들 중에 금이빨을 하신 분이 있슴니꺼?" 두세 차례 확인을 했지만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대 후반에 금이빨을 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영욱은 아버지 김정태의 유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 6월 중순경 경북 김해군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있었던 일이다. 1960년 5월 출범한 금창지구피학살자합동장의위원회(이하 금창장의위원회)는 김해군 진례면 냉정리 뒷산을 포함한 금창지구 일대에서 인부 10여 명과 화물 자동차를 동원해 유해발굴을 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진영역전에 1만여 명이 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