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계몽의 시대는 끝났는가

[상상변주곡 ⑤] 지난 20년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

등록 2007.05.20 10:23수정 2007.05.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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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문학 계몽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문학이 계몽 수단으로 가는 사회는 안타깝다, 사실 문학은 오락이어야 한다."

'오늘의 문학'을 둘러싼 역할 논쟁이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 5회에서 재현됐다. 심진경 문학평론가(<문예중앙> 편집위원)와 이기호 소설가는 '리얼리즘 과잉'을, 고명철 문학평론가는 '리얼리즘 외면'을 각각 주장하면서 팽팽히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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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 평론가(왼쪽), 심진경 평론가(가운데), 이기호 소설가(오른쪽) ⓒ 이정환


이상한 '아담들' 그리고 '탈한국', '탈여성'

논쟁은 심진경 문학평론가(아래 호칭 생략)의 '한국 문학, 어디까지 왔나'란 주제 발표를 통해 촉발됐다.

심진경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문학은 다양한 가치들의 출현과 충돌로 사회적 통합이 불가능한 현실만큼이나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분열적이고 복합적인 변화를 겪어왔다고 할 수 있다"면서 "민주주의 학습에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해온 한국문학이 과연 지금도 그런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민중이라는 상징적 정체성으로는 포섭되기 어려운 다종다양한 개인의 출현을 감지하고 이를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로 이어가려는 최근의 문학적 노력에서 우리는 한국문학의 민주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로 '지금, 한국 문학의 자리'를 민주주의의 진행으로 해석했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를 "1970·80년대의 민중, 민족문학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등장한 1990년대 문학의 시작"으로 소개한 심진경은 "똥과 개가 될망정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삶은 거부하리라는 아담의 격렬한 제스처는 이후 무수한 아담의 아바타를 만들 수 있었고, 그들은 모두 문제적 개인 영웅"이었지만 "1980년대 문학에 대한 일종의 대항문학 성격이 짙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심진경은 2000년대 소설에서는 "이와 같은 대타 의식이 걷혀 있다"며 윤성희, 박민규, 김애란, 표명희, 김중혁, 이기호 등 젊은 작가의 소설을 예로 들었다.

심진경은 "그들의 소설은 가볍다고도 할 수 있으나, 대타 의식이 불러오는 강박과 포즈에서 한결 자유로운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소설에 나타난 "그들은 소속 없이 떠다니는 존재들이며, 스스로를 삼류라 자처하지만, 그런 소속 없음과 반사회적 가치 지향이 사회 전체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반항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한 아웃사이더적 개인주의자"라는 말로 1990년대 문학과의 차이를 설명했다.

'이상한 아웃사이더적 개인주의자'가 나타난 배경에 심진경은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계급 고착화와 IMF 이후 빈부 격차의 확대, 전반적인 소득 수준의 하락이 불러온 불안 의식으로 대표되는 전보다 더욱 비참해진 현실이 있다"고 해석했다. "1990년대 소설을 활보한 자유주의자들의 선택이 그야말로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면, 2000년대 소설의 그것은 어찌 보면 강요된 선택"이란 것이다.

그리고 심진경은 2000년의 '이들에게서'는 "자신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계급적 자의식이 있긴 해도 현실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자각이나 불평등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지지 않고,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통해 자기의 계급을 규정하고, 거기에 항구적 가치를 부여하는 노력은 거부되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심진경은 이로 인해 "최근 소설에서 한국적 현실이 거의 재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면서 "이즈음의 소설에 나타나는 탈한국적 경향들은 실제로 어떤 이유에서건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많아진 세계화시대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강영숙, 전성태, 이혜경, 김영하 등의 소설에 잘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심진경은 "그리고 여성이 있다"면서 "1990년대 공지영, 신경숙, 김형경, 은희경의 작품에서 나타난 '여성'이란 생물학적 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사라졌다"는 말로 여성 문학 역시 '탈여성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배수아의 '성별이 규정되지 않은 존재들', 천운영의 '남근적 여성', 강영숙의 '세계 고통에 공감하는 여성', 황병승의 '여장 남자 시코쿠'등을 예로 들면서 심진경은 "이들 소설에서 관습적인 성차의 흔적이 지워지고 새로운 여성 문학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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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환


"소수 비평가들이 특정 작품에만 의미 부여"
"문학이 계몽 수단인 사회 안타까워"


이와 같은 주제 발표에 대해 고명철 문학평론가(아래 '호칭' 생략)는 "'한국 문학 어디까지 왔나'라기보다는 '2000년대 일부 젊은 문학은 어디까지 왔나'로 발표문이 읽혔다"면서 "지금 호명한 작가들은 자유주의 진영에서 맹활약하는 전체 문학 진영에서 일부로, 한국 문학 전체를 보여주는 현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고명철은 "1990·2000년대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개인의 일상주의가 팽배하는 곤혹스러운 현실에서 고민하고 싸움하는 작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오히려 이들이 비평 그룹에서 철저하게 배격됐다고 봐야 하며, 이는 지금 반드시 되물어야 하는 작업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국경 문제를 여전히 고민하는 방현석, 정도상이나 황석영, 조정래 등 50대 이상 작가들이 왜 주제 발표를 통해 호명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지적한 고명철은 "최근 한국 문학이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것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발견할 수 없고, 소수 비평가들이 특정 작품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심진경의 주제 발표를 겨냥했다.

이어 고명철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예로 탈북자 인신매매 문제를 다룬 정도상의 '함흥·2001·안개'를 예로 들었다.

고명철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주요 매스미디어들은 서구화된 인권 의식으로 탈북자 문제에 다가가지만,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족 인신매매단에 의해 강제 탈북당하는 현실을 정도상의 작품이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겠냐"면서 "도대체 문학을 통해 뭘 계몽할 수 있겠냐는 질문보다는 소설이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한 반성적 기능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명철의 반론에 심진경은 "주제 발표에 개인적 취향이 많이 녹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아직도 70-80년대 문학이 누렸던 사회적 지위에 기대감이 있는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둘러쌌던 사회적 외피를 걷어낸 상황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심진경의 주제 발표를 통해 소개된 소설가 이기호 역시 "내 주위에도 문학이 화염병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친구도 있지만, 저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써야 할 빈 구석'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동안 한국 문학을 리얼리즘 하나만 가로질렀던 만큼, 이제는 조금씩 다양화되고 있는 과정으로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기호는 "문학이 계몽 수단으로 가는 사회는 안타깝다. 문학은 오락이어야 한다"면서 "사실 한국 문학은 아직 너무 너무 어리다. 다양하게 분포하는 과정이 이제부터 커 나가는, 미성숙했던 한국문학이 성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와 6월민주항쟁 2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풀로엮은집'이 기획·진행하는 '상상변주곡'은 이날 토론회로 전체 일정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6회 토론회는 '진보 운동과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주제로 5월 23일(수) 저녁 7시에 서울 배재정동빌딩 B동 1층에서 열릴 예정이다.

#고명철 #심진경 #이기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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