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그 치열했던 일주일의 시간들

[나의 6월 이야기] 열여덟 고교 2년생의 6월 항쟁 참가기

등록 2007.05.22 10:00수정 2007.05.3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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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명동성당. 저 무리들 중에 나도 앉아 있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종철 고문사건, 세상을 보는 눈을 뜨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에 쓰러진 87년 1월은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기간이었다.

건국대 후문 쪽에 위치한 학교 특성상 등하교길로 대학 교정을 오가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읽던 대자보를 통해 어렴풋이 사회에 눈을 뜨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고등학교 1학년의 눈에도 '탁치니까 억하더라'는 발표는 무슨 장난처럼 보여졌다.

'불쌍해서 어쩌나…'를 연발하는 주변 어른들의 목소리에 대자보에서 표현하는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저항감이 자연스레 올라오고 있었다. 호기심 반 궁금증 반.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학기말 고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추도회가 열렸던 87년 2월 7일 발걸음을 명동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명동 종로 광화문 동대문을 배회하며 접한 대규모 시위는 나의 의식을 새롭게 일깨우고 있었다.

새학년이 시작된 3월 3일. 박종철 열사 49재를 맞아 평화대행진이 있다는 소식에 새학기 첫 날부터 당번으로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종로로 나섰고 최루탄 연기와 전경들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뭔가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됐다.

그 해 5월, 탑골 부근에서 열린 5·18추모시위에 참석하러 나갔을 때 나는 막연한 구경꾼이 아닌 적극적인 동조자로 변해있었고 그것은 두 번의 큰 시위가 가져다준 영향이었다.

그런 나에게 6월 10일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규탄 및 호헌철폐를 위한 국민대회'는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고 당연히 동참해야 했던 중요한 시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6월 항쟁의 첫 시위에 참여하다

87년 6월 10일 4시. 중앙극장에서 명동성당 앞을 지나 명동으로 들어섰다. 2·7 추도회 때 명동성당이 태풍의 눈이었던 기억 탓에 성당 주변의 움직임이 그냥 궁금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리로 가본 것인데 의외로 성당 앞은 차분했다. 철거민들 여나믄 명이 앉아 태극기를 들고 있을 뿐 경찰도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4시 30분 명동 입구. 명동을 중심으로 롯데, 미도파, 신세계, 을지로 입구로 이어지는 도심은 정중동 속에 긴장된 분위기였다. 마치 폭발직전의 화약 앞에 서 있는 듯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은 하나둘 뭔가를 기다리는 초조한 표정이었고, 평상시처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번화가의 한복판은 은연중 긴장감을 만들며 이곳저곳을 술렁이게 하고 있었다.

명동 주변으로 늘어서 있는 닭장차들과 흰색 하이바를 번쩍이는 백골단, 매서운 표정으로 그것들을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빛들, 취재 완장을 차고 긴장된 거리를 누비는 기자들. 그리고 뭔가 금방 터질 듯한 분위기. 삼삼오오 모여 있던 낯모르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주고 받으며 담배를 물고 있는 표정에는 초조함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4시 50분. 갑자기 한쪽에서 구호가 들리는가 싶더니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플래시를 터뜨리며 다가서는 기자들,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태극기를 흔들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거리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야당 국회의원들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국회의원들과 그들 뒤로 계속 따라 붙는 시민들. 구호는 순식간에 메아리가 되었고 하나둘 입에서 따라 외쳐지기 시작하더니 거센 파도가 되어 물결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례!! 독재타도!!


저쪽에서 황급히 뛰어오는 백골단이 행진하는 무리들 앞을 에워 쌓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하늘로 휙휙 던져댄다. 땅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펑펑 소리와 함께 터지는 것은 사과탄.

매캐한 냄새와 사방으로 튀는 파편을 맞으며 모여있던 무리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있었지만 웅성거리는 도심 분위기는 기대하던 뭔가를 찾아낸 표정이었다. 잠시 숨을 돌린 듯 하더니 다시 힘차게 들려오는 구호외치는 소리.

작은 불씨가 옮겨 붙으며 마른 장작에 불길이 일어서고 있었다. 목줄기에 핏줄 선명하게 고함치듯 외치는 구호는 바닥에 흘러있는 기름 위로 장작불이 떨어지듯 사방으로 퍼지면서 거센 함성으로 되돌아 왔고 거리는 사람들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군사독재의 폭압에 숨죽였던 민중들의 함성이 거세게 분출하고 있었다.

'4·19가 이랬을 것이고, 5·18도 이런 모습이었겠지?'

87년 6월 10일 그 함성이 울려퍼지는 순간, 상기된 표정의 고등학생은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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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당시 태극기가 펼쳐진 서울의 한 거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실를 박차고 나가 교문을 뛰어 넘으며...

6월 10일 오전. 아침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평일로 잡힌 국민대회일. 신문과 방송은 긴장된 분위기를 연신 전하고 있었고, 등교길 학교 분위기도 왠지 어수선한 모습이다.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인지 수업시간 내내 어떻게 하면 빨리 학교를 빠져나갈지에 내 신경은 온통 곤두설 뿐이었다.

'어떻게든 일찍 집에 가야한다. 그런데 만일 안보내주면…?? 땡땡이라도 쳐야지!!'

6교시가 끝나고 7교시 클럽활동 시간. 역시나 오늘도 자율학습이란다. 감독을 위해 들어와 있던 담임에게 다가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정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내내 몸이 안 좋아서 있기가 힘든데 먼저 들어갔으면 좋겠는데요."

힐끔 나를 쳐다보는 담임의 눈빛.

"많이 아파?"
"많이 아픈 것은 아닌데 피곤하고 힘드네요"
"알았어. 가봐 그럼. 집에서 잘 쉬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마냥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나는 교실문을 나섰고 그 이후로는 달리기 시작했다. 시국이 어수선했기 때문인 듯 그날 따라 버스정류장으로 직통하는 후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담치기를 하여 훌쩍 교문을 넘자 어디선가 나타난 수위의 억센손이 나를 잡아채고 있었다.

"선생님 허락받고 가는 거예요. 집에 일이 생겨서 병원가는 거란 말이예요."

학년 반 번 담임선생님 이름까지 대며 또박또박 대꾸하는 나에게 수위도 어쩔 수 없는 듯 손에서 힘을 뺏고 나는 또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내달렸다.

움직이기 편하게 가방을 놓고 손수건을 챙겨 후다닥 튀어 나가는 내 모습에 어머님은 갑자기 일찍 들어온 것도 이상한데 어디를 그렇게 황급히 가는 건지 의아스런 표정이었다.

도심이 가까워 올수록 닭장차와 전경들이 눈에 띄게 많이 들어왔고, 길에서 주워 품속에 간직한 태극기는 나의 유일한 시위 도구였다.

가슴 벅차게 부르던 애국가, 그리고 경적소리

명동입구와 롯데백화점 앞으로 중심으로 경찰과 시위대의 밀고 밀리는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구호를 외치고 있노라면 조금있다 최루탄이 날아들었고,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백골단의 흰색 하이바가 순식간에 나타나며 골목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다.

골목을 헤치고 나와 사람이 모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거리는 장악됐고 곧이어 백골단과 최루탄이 날아드는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골단을 피해 이리저리로 피해다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소공동 쪽으로 빠져들었다.

"자 이쪽으로들 모이세요. 곧 여섯시가 됩니다. 함께 애국가를 부릅시다."

롯데백화점과 호텔 뒤쪽으로 자리잡은 롯데센터 안. 최루가스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공동 골목에서 피해 들어온 그곳은 그나마 안전지대였다. 간간이 입구로 사과탄이 날아들기는 했지만 숨을 돌리며 상황을 보기에는 꽤 좋은 장소였다. 저쪽으로 전경들이 벽을 쌓아 막고 있는 본 대회장소 성공회 대성당이 보였고 시청 앞 을지로 입구가 눈아래 펼쳐졌다.

6시가 다 되었을 즈음. 대학생 한명이 애국가를 부르자며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으고 있었다. 6시 정각. 시청의 국기 하강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국민운동본부의 지침에 따라 모두들 한마음이 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내가 이토록 절절한 심정으로 애국가를 불렀던 적이 있었던가? 여기저기서 애국가 소리가 들리며 마치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군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4·19때 경무대로 행진하던 시위대의 마음또한 이랬겠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날 부른 애국가는 특별했다. 한구절 한구절을 부르자 괜히 가슴이 메이고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조회 때 부르던 애국가와는 또다른 느낌이다.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뜨던 고등학생의 마음에 애국가 한구절 한구절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떤 벅참으로 올라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시끄럽던 최루탄 소리와 구호소리가 6시에 맞추어 약속이라도 한듯 멈춘 분위기였고, 옆에선 대학생들과 일반인들의 모습 또한 앳된 눈으로 쳐다보는 고등학생의 표정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숙연하기까지 했다. 한쪽에서 눈을 질끈 감고 애국가를 부르던 아저씨의 모습은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마지막 소절이 끝나가며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해야지' 마음을 다지던 찰나적 순간, 애국가가 끝나자 동시에 커다란 경적 소리가 귓전을 울려오기 시작했다.

"빵빵~~ 빵빵~ 빠~앙~~~"

모든 차들이 경적소리를 울려댔고, 고무된 목소리들이 "와~" 하는 함성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최루탄 소리보다 더 큰 경적소리가 시청 앞으로 해서 을지로 태평로 쪽으로 그리고 광화문과 시내 전역에서 울리고 있었다.

경적소리와 함성소리가 섞이며 독재정권을 향한 분노의 외침이 거센 물보라치듯 세차게 퍼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저기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택시를 모는 운전기사들, 트럭에 물건을 싣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시위에 나선 모든 사람들과 한 마음이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구호 한 마디에 힘이 더욱 들었갔고, 허공을 휘젓는 팔뚝질에 실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6시.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6시에 애국가를 부르고 차들은 경적을 울리라는 국민운동본부의 지침에 모든 국민들이 호응하는 것 같았다.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해제 당하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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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앞에서 포위된 전경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뚫렸다!!"

어디선가 커다란 외침이 전달돼 오며 내 쪽까지 들려왔다. 소공동 골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에 섞여 허겁지겁 신세계 앞으로 내달렸다. 중앙우체국-신세계-남대문시장 앞쪽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하 이것이 해방구로구나!!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한국은행 앞에서 벽을 기대고 선 채 시위대에 둘러쌓인 전경들은 거센 돌팔매를 당하는 중이었고, 로마병정 같은 모습으로 늘 위압감을 주던 전경들이 시위대에 포위되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돌세례를 받고 있는 그들은 포위된 패잔병들이었다.

이내 돌팔매가 잦아들더니 전경들의 방패와 방석모가 시위대에게 압수됐고 그것들은 분노한 사람들에 의해 밟히고 내팽겨쳐지며 파편 조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방독면이 벗겨지자 잔뜩 겁먹은 전경들은 최루가스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표정.

잠시 후, 그들이 우리를 연행할 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서로의 허리를 잡은 뒤 일렬로 남대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승리한 듯한 거센 함성과 구호소리가 하늘로 드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빠바바바방!! 빠바바바방!!"

순간 우뢰같은 소리와 함께 지랄탄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최루가스가 안개처럼 퍼져나갔고 나는 조선호텔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건물 한쪽 철망이 쳐져 있는데 어떻게 뛰어 넘은 것인지 나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는 게 불안한 듯 또다른 담을 넘어 또다른 건물 쪽으로 피해갔다.

한국은행 앞 널찍한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또다시 흩어지더니 잠시 소강상태. 몇 분이 흘렀을까 또다시 구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한국은행과 치안본부 주변은 다시 경찰들이 장악한 것 같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잠시도 주춤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는 구호소리. 사방에서 터지는 최루탄 소리에 잠시 끊기는가 했지만 지치지 않고 외쳐대는 그 구호는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들이 느껴질 만큼 악이 담겨있었다.

을지로 쪽에서 또다른 공방이 전개되고 있었다. 최루탄 소리가 커지며 싸움은 더 치열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 사람이 모인 곳에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하는 전경들을 피해 골목골목을 누비며 목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당시 시행된 서머타임은 해지는 시간을 9시쯤으로 만들어 놓으며 시위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한 번 달아오른 분노의 활화산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갈 즈음 어디선가 나온 구전지침이 돌기 시작했다.

"8시 명동입구 집결. 9시 명동성당 집결"

명동입구로의 진출을 몇 차례 시도했으나 경찰의 저지선에 여의치 않았고 중앙우체국 뒤편으로 빠져 명동입구 쪽으로 향할 즈음 또다시 사과탄 공격과 백골단이 몰려오자 황급히 차들 사이를 헤치며 건너편으로 피했다.

명동성당쪽 상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저씨 명동성당쪽은 어때요?"
"그쪽 봉쇄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명동입구에 성당이 봉쇄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명동입구 쪽으로 경찰들의 수가 엄청 늘어나 있다. 명동성당쪽으로 진출이 여의치 않는 분위기.

9시가 넘어서며 어둠이 내리 깔렸고, 유인물과 휴지 돌맹이 등 거센 싸움의 흔적들이 거리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들리는 구호 소리와 이내 그것을 잠재우려는 듯 들리는 최루탄 소리.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군사독재를 향한 저항의 외침은 그쳐지지 않았고, 그 소리와 함께 6월 10일의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6월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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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당시 시위에 참가한 '넥타이 부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명동성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침 뉴스를 통해서였다. 관제 뉴스는 어제의 거센 시위를 일반적인 시위처럼 평범하게 보도하면서 명동소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내 관심은 오직 명동성당이었고, 그날 이후 나의 명동행은 15일까지 내내 이어졌다.

11일. 명동성당 주변 지하철 입구와 주요 길목에서 엄중한 검문을 하는 경찰에게 고등학생을 증명하는 학생증은 무사 통과의 보증수표였다. 고등학생임이 확인되면 그냥 무조건 통과였으니까. 충무로 백병원 쪽에서 시위를 하며 멀찍이 명동성당에 있는 분들에게 손들 흔들었다. 서울지역 각 대학에서 나온 학생들의 시위가 을지로방면에서 집중되면서 그쪽으로 합류했다. 어제만큼 치열했던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에 쫓기며 숨어든 가게, 주인 아저씨는 조용히 숨겨주고는 물까지 주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세상이 뭣 같으니 젊은 너희들이 고생하는구나"

가게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에게 조심하라며 걱정해 주는 인쇄골목 아저씨는 깊게 새겨지는 6월의 풍경이었다.

12일은 남대문을 누비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드센 남대문시장 아주머니들은 학생들을 숨겨주는 것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연행하는 경찰에게 거칠게 항의하며 시위대의 힘을 북돋고 있었다. 13일 계성여고 입구 쪽에서 보게된 즉흥시위 장면은 6월 시위 중 참 인상적인 장면이다.

계성여고 후문 부근에서 명동성당쪽을 응시하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혹시라도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지 않을까 기다리는 표정으로 구경나온 사람들처럼도 보였다. 한 아저씨가 나서 전두환과 민정단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젊은 대학생 죽이고 그것 은폐하고 호헌한다고 떠들어대는 전두환과 민정당은 나쁜 놈들이여."

옳은 이야기다 맞다는 추임새가 이어지자 또다른 아저씨가 이야기를 했다.

"지금 전두환이 다 욕하고 있어.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줘야해."

또다시 옳소 소리가 들린다. 성토 분위기는 자연스레 시위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그때 누가 먼저 선창을 했는지 아리랑이 울려퍼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운동가요를 모르는 시민들은 아리랑을 따라부르기 시작했고 그저 시위 모습을 구경하러 왔다가 시위대로 돌변한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호헌철페 독재타도'가 아닌 '독재타도 독재타도'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독재타도!! 독재타도!!"

채 몇 분이 안 돼서 백골단이 몰려든다. 아마도 그들 나름대로 작전을 짰던 모양이다. 한 곳도 아닌 세 군데서 동시에 치고 들어왔으니. 그런데 열심히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는 눈치였으나 나이든 아저씨들 밖에는 보이지 않자 물러서는 그들. 백골단이 멀어지자 아저씨들의 고함이 잇따른다.

"야이 전두환의 똥개들아!!"
"나라도 잡아가지 왜 그냥가냐!!"


멀어지는 경찰들 뒤로 시민들은 무서울게 없다는 듯 거침없이 외치고 있었다.

14일. 명동성당의 주일미사를 위해 굳게 닫혀있던 경찰의 차단벽이 열린 날, 봉쇄됐던 명동성당의 출입이 허용됐고 몰려든 사람들은 성당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함성.

6월 10일 이후의 시위를 계속 이끌어 온 명동의 사람들은 시민들의 환호와 박수에 벅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위대의 동태를 살피러 들어왔던 내무부차관이 그를 알아본 사진기자들의 플래시에 신분이 발각나며 끌려 나가는 소동이 벌어져 잠시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명동성당은 모든 사람들이 뿌듯함 속에 함께 할 수 있었던 멋진 해방구였다.

15일. 1주일여를 끌어온 명동의 농성은 자체 투표를 통해 해산됐다. 그러나 그날 저녁 성당은 2만여명의 신자들에 의해 다시금 가득 메워졌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직접 집전한 시국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5시부터 성당으로 모여들던 신자들.

추기경님이 문화관 쪽에서 본당으로 걸어나가자 사람숲이던 성당 앞 마당에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생기며 추기경님을 향한 박수가 터져 나온다. 미사 도중 거센 소나기가 내리기도 했지만 본당 주변에 가득찬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꿋꿋이 강론을 들었고 그것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와 26일 평화대행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충무로를 가득 메운 대학생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던 시민들. 애국가와 경적의 장면은 지금도 불끈불끈 그날의 기분을 젖게 만든다.

열여덟 고등학생으로 참여했던 1987년 6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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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탁발순례에 참가중인 필자(정지용 시인 동상 바로 왼편) ⓒ 생명평화결사

20년에 흐른 지금. 6월 10일 그날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책으로 읽던 4·19와 사진과 비디오로 접했던 5·18과는 다르게 87년 6월은 내게 직접적 경험으로 다가왔고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한 주체로 참여했다는 것이 큰 뿌듯함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 그 순간의 기억이 며칠 안 된 일처럼 생생하고 시위 상황을 메모해 둔 수첩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못버린 채 간직하고 있다. 그만큼 87년 6월은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20년이 흘렀지만 그날을 기억하면 이렇듯 흥분되는 것은 고등학교 2학년생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을 깊게 각인시킨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리라.

그해 6월은 내 의식에 많은 변화를 안겨준 시간이었다. 현실에 대한 고민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했고, 그것은 내 주변의 비민주적인 모습을 개선하는 작은 실천으로 작용했다. 간선제로 되어 있던 학생회를 직선제로 바꾸기 위해 싸웠고, 11월 학생의 날에는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기념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입시교육에 몰려 자살한 내 또래 학생들을 위한 추모 행사 등을 여러 친구들과 함께 조직해 내는 것도 내가 해야 될 일이었다. 그것은 졸업후 전교조로 인해 해직된 선생님들을 돕는 일들로 이어지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구미 울산 마산 창원에서의 현장생활은 내가 지향하는 세상을 위한 실천이면서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기름때를 묻히며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느꼈던 노동자의 삶. 노동의 가치와 그 소중함을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열여덟 고등학생은 이제 서른여덟의 장년으로 사회의 한 축이 되었다. 고등학생 투사는 일상에 부대끼는 평범한 소시민이 되었고 생명과 평화, 환경, 교육운동 등에 관심을 두고 관여하며 진보하는 삶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의식또한 변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간혹 의식에 흔들림이 생길 때마다 나는 87년 6월을 떠올린다. 그때 내가 뛰어다닌 거리와 그당시 뜨겁게 외친 구호가 결코 한순간의 치기가 아닌 민주주의와 올바른 세상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었기에 그 당시의 굳은 마음으로 세상에 맞서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87년 6월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삶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내 삶의 방향을 잡게해 준 의미깊은 시간이었기에.

훗날,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난 그날 명동에 있었다"고.

덧붙이는 글 | 나의 6월 이야기 응모

덧붙이는 글 나의 6월 이야기 응모
#6월항쟁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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