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눈물도 원망도 버려야 했다

[나의 6월 이야기] 상처가 영광이었던 시절

등록 2007.05.23 11:52수정 2007.05.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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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계절

인간은 누구에게나 삶의 방식 전체가 바뀌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은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다. 순간이 임의로 나를 습격하듯이 찾아올 뿐이다. 나는 그 순간을 밀어낼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눈을 뜨고 있는 한 나는 그것을 보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날짜도 연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종로 거리에서 죽은 비둘기들을 보았다. 육교 아래 쓰레기통 옆으로 치워져 있었다. 웬 비둘기가 이렇게도 떼로 죽었느냐고 가게 주인에게 물었더니 지랄탄 때문이라고 했다.

지랄탄이라니. 생전 처음 듣는 이름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인은 말했다. 지랄탄이라는 것이 하필 비둘기집으로 들어갔다고.

나는 지랄탄을 구경할 목적으로 집회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서울역 앞 현장에서 마침내 그것을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은 참 지랄 같았다. 땅에 떨어져서도 멈추지를 않고 사람들의 발과 발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독가스를 뿜어내는 그것은 정말이지 보고 또 보아도 지랄 같았다.

그 어떤 화살도 능히 막아낼 것처럼 단단하게 짜여 있던 스크럼이 어느 순간 무너졌다. 눈을 뜰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말을 하면 목구멍에서 금방 피가 넘어올 듯이 지독한 독가스가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물이 필요했다. 타들어가는 목도 축여야 했고 살갗을 파고드는 독가스를 씻어내는 데도 물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물은 없었다. 물이 없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물은 없었다.

"학생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남 장사도 못 하게 무슨 짓들이야 이게, 물 없어."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안 닫고 구경을 하던 가게도 물을 달라는 소리가 들리자 찢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 걸었다. 아마 모든 가게 주인들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하필 내 눈에 보인 가게들만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 장면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인심이 아무리 험악하다 해도 물 한 그릇은 주는 법인데, 그것도 아직 나이 어린 학생들의 갈증이거늘, 버들잎을 띄워주지는 못하나마 저렇게까지 문을 닫아걸어 버리는 까닭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충격적인 장면이 나로 하여금 이후 십여 년 동안을 툭하면 집회현장으로 달려가게 했을 것이다. 왜? 글쎄,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절망을 털어내고자 하는 어떤 의지랄까 오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말을 배워야 했던 시절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전라도에서 태어났으니 싫거나 좋거나 전라도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의심의 여지가 한치도 없는 전라도 사람이다. 십대 후반의 어느 해 선배를 따라 경상북도 구미공단의 한 공사현장으로 막노동을 갔다가 시장 모퉁이 국밥집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절마들 저거 전라도치기 아이가."

지금도 그 치기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때도 물론 그 뜻을 알지는 못했다.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느낌은 확실하게 있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서둘러 밥을 먹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는 않았다. 우리가 밝히지 않았어도 우리의 말투가 이미 우리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두환씨의 등장이 전라도 차별화의 시발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아니다. 나는 칠십년대 후반에 이미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다. 지금 영어열풍이 온 나라를 장악하고 있듯이, 그때 전라도 출신 도시인들 태반은 서울말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그랬다.

전라도 티가 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그 어떤 법률도 원칙도 공식적으로는 없었지만, 위험이 느껴지면 제 새끼를 죽이거나 혹은 먹어 버리는 토끼처럼, 언제부터인가 전라도를 고향으로 둔 이들은 거의 자해에 가까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무슨 잘난 지혜랄 것조차도 없는 이런 비굴한 삶의 방식은 빨치산과 전라도를 동의어로 파악하는 권력 상층부의 편견이 낳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지만 그들은 아니라고 한다. 유신이 구국의 결단이었듯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라도를 의심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그들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은근슬쩍 노래를 부른다.

아들이 똑똑한 탓에 빨치산이 되었다고 믿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를 절대로 중학교 이상은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머리는 돌아가는데 손발이 묶인 손자 가운데 하나는 자살을 했고 또 하나는 뒷골목 조직 세계 같은 데를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자살도 못하고 조직 세계 같은 곳에도 관심을 못 두는 전라도 출신에 빨치산 핏줄은 그러면 어떻게 하나? 고시공부를 하듯이 열심히 서울말을 배웠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친구로 둔 까닭에 토끼처럼 일찌감치 주눅부터 들어버린 사람들 역시도 머리가 커지면 서울말 배우기 전선에 뛰어들었다.

입에 익은 단어 '어무이'를 '엄마'로 번역하고 '아따 그랬다냐'를 '아, 그렇구나'로 번역해서 우아하고 심플하게 주절거리는 그런 서울말 공부는 기실 단어풀이의 문제가 아니라 억양의 문제였기 때문에 어렵고도 어렵고 정말로 어려운 공부였다.

정치 비슷한 것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이 외국말을 배우듯이 밤낮으로 서울말을 연습하면서, 소처럼 묵묵히 일을 해서 돈이나 벌자는 뭐랄까, 꿈 같지만 꿈도 아니고, 희망 같지만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국어를 모독하는 것 같은 그런 낮도깨비 같은 청춘의 시기를 나는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이 죽었다. 그것도 '총살'을 당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앞집의 아주머니가 슬프게 하루 종일 우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나이는 나보다도 한참이나 많으면서도 그때까지 자기 집은커녕 전세도 아니고 나와 똑같은 사글세나 살고 있는 주제에 대통령이 죽었다고 골목에 퍼질러 앉아 종일토록 훌쩍거리는 저 여자는 대체 뭐란 말이냐.

내가 모르는 뭔가 거대한 것을 세상이 감추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뭔지를 몰라서 나는 애가 탔다. 몇날며칠 아니 몇 달이 지나도 그 아주머니의 눈물은 사라지지 않고 내 머릿속을 흘렀다.

그렇게 해서 나는 텔레비전 뉴스에서나 보았던 집회현장이라는 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날 일은 아예 포기한 채로 종암동 텍사스 건너편 산꼭대기 마을에서 십여 분을 걸어 버스를 타고 일단 종로로 갔다.

전직 정보부 간부와의 기이한 동거

앞집 아주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나로 하여금 집회현장을 구경이라도 해보게 했다면, 나로 하여금 집회현장을 아예 직업처럼 쫓아다니도록 깊은 의혹을 심어준 사람은 아무래도 정보부 간부를 했었다는 바로 그 남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남자, 피바람이 몰아치는 팔십년도 지나고 이듬해 칠월인가 팔월 어느 날 그가 내 옆방으로 이사를 왔다. 딸이 둘에 아들이 하나 그리고 오십대의 부부 그렇게 다섯이나 되는 대식구가 두 평이나 겨우 넘어서는 방에 살림을 풀었다.

말이 좋아 살림이지 각자 하나씩 손에 든 가방이 전부인,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가난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 참으로 기이한 가족이었다. 무슨 가난을 체험학습하자는 것도 아니겠고, 아무리 사글세라지만 캠핑버너 하나에 냄비가 서넛 그리고 숟가락에 젓가락 한 벌씩이 전부인 그 기이한 가족을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마 기이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석유곤로를 빌려주기도 하고, 반찬거리를 나눠먹기도 하고, 수박 따위를 사면 다함께 가족처럼 둘러앉기도 하고 등등 그렇게. 그리하여 조금씩 알아갔다. 그들이 이 년 가까이나 도피 중이라는 것을, 처음 일 년은 여기저기 호텔을 전전했고, 몇 달간은 여관 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사글세를 찾는 처지로까지 전락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게 그들을 몇 달간에 걸쳐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동안, 그들은 어이없게도 나를 자신들의 양아들로 삼아도 괜찮겠는가의 문제를 놓고 심사숙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나의 옆방으로 이사를 들고 며칠 안 되어서 벌써 나에 대한 모든 신상정보를 파악해놓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양아들로 삼고자 한 이유는 내가 온전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짐작컨대 첫째는 외로움이요 둘째는 생활고를 타개하고자 하는 고육지책이었다고 여겨진다. 하긴 그들도 외로웠을 것이다. 일가친척을 만날 수도 없고, 선배다 후배다 연줄은 거미줄처럼 깔려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역시 접촉할 수가 없었다. 재산도 여기저기 깔려 있었겠지만 당연하게도 모두 동결되었다.

아주머니의 말로는 아저씨가 정보기관 내에서도 열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직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수장이 대통령을 사살하고 체포되었다. 조직은 순식간에 전두환으로 표상되는 보안사령부의 관리를 받게 되었고, 간부들은 일제히 체포되거나 도피생활로 들어갔다.

권력의 속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체포 따위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 속성을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권력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일 게다. 그리하여 그들은, 뭐 그리 큰 죄를 지은 것도 없으면서 도피생활로 들어가고, 처음 얼마간은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깔린 연줄을 동원해서 구명운동을 펴는 한편 생활비를 지원받기도 하지만, 차츰 그것조차도 어려워지게 되고, 그리하여 종당에는 나 같은 공사장의 날품팔이를 양아들로라도 삼아서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자 한다.

권력에 대한 이런 끔찍한 나의 성찰이 관념적이고 감정적일 수 있다는 비판을 경계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자면, 그 댁에는 사글세를 살면서도 집주인도 없는 전화를 놓고 있었고, 그리고 벽에는 수십 아니 백 명을 훨씬 넘어 보이는 주소록이 붙어 있었는데, 그 주소록에 적힌 인물들은 직책이 최소한 대령이나 국장이요, 차관이니 장관이니 무슨 이사장이니 등등 나로서는 평생을 가도 그 이름조차 언급할 일이 없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요란스런 주소록을 왜 하필 벽에 붙여놓고 내가 볼 수 있게 하는 것일까. 그 깊은 속내를 내가 다 안다고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그것이 나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기 위한 유혹으로밖에는 안 보이던 것이다.

도무지 뭐라고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 안타까운 정성이, 그 비천스러움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하고 있었다. 나로 하여금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서울말이나 배우게 했던 권력이라는 것의 얼굴이 겨우 이런 따위였더란 말이냐?

만약에 그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면, 죽어야 산다는 철학 정도는 몸소 실천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나 같은 삼류 돌팔이 얼치기 국민이 감히 반정부 집회현장을 기웃거리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조직도 연대도 없는 나홀로 행진의 세월

나는 학생도 아니고, 민중연합 같은 단체의 회원도 아니었다. 회원이 아닐 뿐만 아니라 회원이 되고자 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뭐라고나 할까. 무식한 내가 보기에 그런 단체의 회원들은 굉장한 뭔가가 있는 듯이 여겨졌다. '노가다판'에서 삽질이나 하는 나 같은 인간은 감히 끼어들자고 신청서도 내보지 못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도 당당하게 차도를 점령할 수 있으며, 어찌 그렇게도 당연한 듯이 공권력과 맞설 수 있단 말이냐.

겨우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남루와 비루가 뼛속에까지 스며들어 버린, 그러면서도 가슴은 뛰고 머릿속에서는 불꽃이 연일 지펴 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돈이나 열심히 벌자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고 밤 늦게 비틀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예전의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오라는 사람도 없고 약속된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건만 그 무슨 안 보면 죽고 못살 애인이라도 거기에 있는 듯이 나는 사흘이 멀다고 최루탄 냄새 난무하는 도심의 거리를 훈련이 잘된 개처럼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대열에 합류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도 아니면서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끼어들 용기는 내게 없었다. 이런저런 단체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 또한 내 자리는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얌전한 모범생처럼 보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구호가 나오면 누가 들을세라 가만히 입속으로 재창이나 하고 그러는 것이었다.

마침내 최루탄이 발사되고, 지랄탄이 지랄을 떨고 백골단이 나타나고, 그러면 대오가 흩어지면서 학생이건 민중연대 회원이건 구경꾼이건 구별이 없이 모두가 눈물 콧물을 철철 흘리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밟히고 피를 흘리는 등 모두는 하나가 되고 하나는 모두가 되어버리는데 그 순간만은 내게도 뿌듯한 소속감 같은 것이 주어지곤 했다. 나도 한패라고 하는, 예전에는 없었던 자격이 내게 주어지고 있다는, 아, 내가 그토록 집회현장을 찾아다녔던 이유는 어쩌면 그 한순간의 뿌듯함 때문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내게 가해지는 폭력과 부상이 크면 클수록 나는 위로를 느꼈다. 넘어져서 등판에 몇 개인가의 발자국이 찍히면 그것은 곧 내게 주어진 명예의 훈장이었다. 어느 날은 그 유명한 직격탄으로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날의 부상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고 명예심을 고취시켰는가는 여기서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피가 쏟아진 것은 물론이고 정강이뼈가 푹 들어갈 정도의 깊은 부상이었지만 병원을 갈 생각은 해보지도 않은 채 셋방에서 혼자 부목을 대는 등 이십여 일 동안 자가 치료를 했다. 병원은 입구마다 사복이 깔려 있어서 최루탄 냄새 풍기는 환자를 나꿔채간다는 소문이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병원비를 지불할 여력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명예로운 상처를 내 손으로 직접 관리하고 싶다는 기이한 이기심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서서히 조금씩 사회의 주인으로 등극하고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유월 그날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날 그 해의 6월 그날 나는 신설동의 한 사무실에서 잡무를 보고 있었다. 모든 차량은 경적을 울려서 무도한 정권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달라는 연합 차원의 호소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요식업협회에 무엇인가를 요청했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런데 오후 두시쯤이나 되었을까. 아래층 다방에서 종업원이 느닷없는 커피를 들고 왔다.

그게 웬 커피냐고 물으니 "이렇게도 좋은 날 이런 것이라도 안 하면 어떻게 사람일 수 있냐"고 한다.

이렇게도 좋은 날.
어떻게 사람일 수 있느냐.

조잘대는 다방 아가씨의 그 입술이 어찌나 이상해 보이던지, "아이, 이, 이게 뭐냐."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뒤통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거리로 뛰쳐나왔다. 어떻게 해서든 남자로부터 커피 한 잔이라도 얻어 마셔야만 하는 것을 이 땅에 태어난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정신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해 온 다방 아가씨의 그 한 마디가 나로 하여금 80년의 그날 서울역 앞에서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필름을 아주 빠르게 거꾸로 돌리듯이, 신설동에서 서울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신설동에 전철도 있었건만, 전철이건 택시건 뭔가를 타고 간다는 생각은 해볼 수도 없는 채로 숭인동을 지나 종로5가, 4가를 지나 방향을 틀어서 청계천을 가로질러 을지로, 퇴계로를 지나서 마침내 서울역, 저 80년 5월의 그날 피를 토하며 물을 찾는 학생들에게 물 없다며 매몰차게 가게 문을 달아버리던 그 끔찍한 아저씨의 얼굴이 있던 곳 그 자리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보았다. 그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서 경적을 울리는 택시 운전기사에게 음료수병을 건네며 호쾌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울어야 할 이유도 없는데 눈물이 질펀하게 쏟아져 나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번 원없이 울어본 날이었다.

이것이었구나. 눈물.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정처도 없이 찾아 헤매던 것이 바로 이 눈물이었던 거야.

그리고 이십 년, 아, 벌써 이십 년이란 말인가, 소리밖에는 안 나온다.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던가. 김대중 김영삼 양씨의 분열이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아쉽고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하면 순진하다 할까? 그래, 나는 아직도 이렇게 뭘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안다. 그들의 분열이 살인자들에게 많은 용기와 자긍심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뻔뻔해도 괜찮다는 일종의 면죄부로 작용했다는 것을.


에필로그

보수를 자처하는 어떤 소설가는 그 해의 6월을 혁명으로 봐야 한다고도 하지만 글쎄, 가해자는 돌처럼 피 한 방울 내놓지 않는데 오직 피 흘린 자들만이 모여서 벌인 하루만의 위안을 혁명이라 부르고도 역사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착취시스템을 시장경제라는 말로 아름답게 포장할 줄 아는 이들의 눈에는 그것도 아마 혁명으로 비쳐질 수도 있기는 하겠다 싶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거대한 민중적 에너지의 폭발이 없기를 진정으로 바랄 테니까. 게다가 혁명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보잘것없는 하루만의 위안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릴 것인가 하는 일종의 교훈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어쨌든 손해될 일이 없는 장사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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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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