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개방성과 실용성에 대한 감상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등록 2007.06.20 16:21수정 2007.06.2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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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라는 혹성에 수많은 종족의 인류가 문명을 구축하다가 명멸해갔다. 그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명이 서양의 로마와 동양의 한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이 두 문명은 지금까지도 제각각 동서양 문명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평소 동서양의 역사 발전을 공부하면서, 나는 항상 '동시대'(contemporary 혹은 contemporaneous)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서양에서 로마가 융성했을 때 동양에서는 한나라가 융성했다. 그러나 이 두 문명은 그 존속 기간에서도 비교가 되질 않지만, 그 발전 양태도 사뭇 다르다.

로마사 연구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긴 영국의 에드워드·기번(로마 제국 쇠망사)과 쌍벽을 이루는 독일의 몸젠은 "로마인은 다른 민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을 로마인으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촌철살인의 명구를 남기고 있다. 이 말은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르코스가 "패자조차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생활 방식이야 말로 로마가 융성한 요인"이라고 갈파한 것과 맥이 통하는 말일 것이다.

철학이나 예술에서는 그리스인에게, 체력에서는 육식 민족인 갈리아 인이나 게르만 인에게 뒤떨어지고, 기술력에서도 에트루리아 인에게서 아-치와 볼트의 건축기술을 배웠던 라틴 민족의 나라 로마가, 경제적 재능에서는 카르타고 인이나 유대 인에게도 훨씬 미치지 못한 자질을 지녔던 로마가 이 모든 나라를 굴복시켰다기보다는 자기들에게 동화시키고 자기 품으로 포용하여 대제국을 건설하고, 게다가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은 한마디로 그 툭 터인 개방성과 자기 힘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남의 것을 활용할 줄 알았던 지혜,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한편, 그 반대로 동시대 동양의 주역이었던 한나라는 진나라 때부터 쌓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그만두고라도 중화의 틀 안에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구별 짓고 자기 세계 안에서 철저히 자기 위주로 다른 나라를 배척하면서 나라를 경영했던 폐쇄적인 사회였다.

얼핏 보기에 그 문화가 화려하고 눈부신 바가 있었을 런지는 모르지만 그 문명은 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이 얼마나 지속했는가? 후한까지를 고려한다하더라도... 한편으로 나는 이러한 폐쇄사회 내지는 나라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한참 역사를 흘러 내려와서 우리나라 구한말 대원국 쇄국정책에서 크나큰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흑선(黑船) 이후의 명치유신기에 어떻게 나라를 경영해왔던가? 우리가 그들의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단지 개방과 폐쇄라는 마음가짐 하나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은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그것을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정착시켜다는 것이 정설이다. 제정시대에 들어서서 제 2대 티베리우스 황제는 선대에 이룩해놓은 것을 유지·보수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새로운 건설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른바, 포퓰리즘의 정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눈에 띄게 무엇을 건설하거나 하면 좋은 평가를 하는 것이 인심이다. 또, 실제 그 유용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수성과 보수도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역사이다.

당대에는 인기가 없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독일의 역사가 몸젠에 의해 재평가 받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평가해줄까? 평가해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에게는 신전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사람들 마음에 남을 조상이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낀다. 로마 황제의 사생활면(私生活面) 등에서 가십 성격의 탁월한 기록을 남겼던 스에토니우스가 티베리우스의 성적·도덕성면을 질타한 것 등은 별개의 문제로 우리가 거론할 바가 못 된다.

로마사의 최정점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카이사르이다. 그 인간적인 매력은 차치하고라도 역사를 보는 그 혜안은 실로 놀랄 만 하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더 이상은 공화제를 유지하기에는 그 사회가 질적 양적으로 커졌다는 것을 절감하고, 거의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제정의 기초를 닦아왔던 것이다.

브루투스 일당이 카이사를 암살한 사건을, 카이사르의 독재체제를 저지하기 위해 그를 죽였다고 보는 것은 너무 평면적이고 얕은 수준의 역사해석이다. 국가를 어떻게 경영해야하는가라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 분출구가 카이사르의 암살이었다.

공화정 체제를 유지해야한다는 브루투스 일당과 점차로 강력한 제정의 형태로 나아가야 로마를 이끌어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던 카이사르의 충돌이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때부터 그는 이런 구상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후 그가 '파르티아'원정을 앞둔 직전(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이런 비극을 맞게 된 것은 역사를 주관하는 신의 섭리일까? 아니면 해찰일까?

카이사르 이후에도 로마는 훌륭한 황제를 많이 배출했다. 이른바, 팍스로마나 시대의 아우구스투스, 별로 본인이 내켜하지 않았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가 기대 이상의 치적을 쌓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또 우리가 많이들 알고 있는 오현재 시대의 철인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또 다른 의미에서 로마사에서 큰 획을 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등 로마사는 정말 흥미진진하다.

심지어 네로, 칼리굴라 황제도 평면적으로 단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제들이었다. 로마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는 후대에 와서 속주출신의 황제가 여럿 배출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치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개방성 말고 로마가 융성했던 요인 중에 또 하나는 그들의 철저한 실용주의의 정신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실사구시의 정신이다. 그들이 구축한 인프라 중에서 아피아 가도(街道)를 비롯한 수도(水道)의 정밀한 토목기술은 한마디로 찬탄이외에는 할말이 없다.

배수를 위해서 길 가운데를 약간 도도록하게 만들고 차도 4m 이상, 양쪽 인도 각 3m, 거기에서 얼마이상 떨어져서 나무를 심어야한다는 그 과학정신에 이르러서야... 그러나 나는 그것 못지않게 그러한 로마인의 위대한 실용정신을 단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포에니 전쟁에서 구사하여 해전에 약하다는 로마를 일약 지중해의 강자로 일으킨 그 '까마귀'같은 신무기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지중해를 주름잡던 카르타고인들은 항해술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자만했으며 선박의 미관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전쟁의 최후 목적은 적을 쳐부수고 승리하는 것이라는 사실! 무엇이 최종 골(Goal)인가를 분명히 알고 행동한 사람들이었다.

'까마귀'같은 기묘한 물체를 돛대에 부착하는 것은 바다와 선박에 대한 모독이라고 카르타고인들은 생각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런 허영은 일찌감치 버렸다. 그런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까마귀'를 부착한 로마의 선박은 카르타고를 쳐부수고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 이후 그들의 부지런함과 실용정신으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도로와 수로를 건설하여 공동의 번영을 구가했다. 여기에서 나는 조선의 영·정조 이후 대두되기 시작한 실학자들의 선구적인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수원성을 구축할 때 도산 정약용 선생이 고안한 거중기를 보고 우리 민족의 우수함에 들뜬 적이 있었다.

달도 차면 기운다. 로마가 그만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개방성과 실용정신이 이루어내었던 기적이다. 그런 뜻에서 '기번'은 "로마가 왜 멸망했느냐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로마의 역대 황제 중에 안토니우스 피우스라는 황제가 있다.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기를 거치고 나서 본의 아니게 황제가 되어 로마사에서 가장 평화롭고 안온하게 그 자신의 생애와 국가를 경영했던 황제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기술한 "콤모두스로부터 비롯된 로마 멸망사의 시작은 사실은 어쩌면 평화와 황금시대(Saeculum aureum)라고 일컬어지던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의 치세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공감한다.

나는 인류 문명사의 찬란한 한 시대를 열었던 로마의 흥륭과 쇠망을 개방과 실용성의 추구에서 안주와 나약함과 나태에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면 더욱더 편안함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편안함 속에서도 내가 지금 어디쯤에서 쉬고 있는가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한다. 그러면 또 다른 발전을 위한 재충전의 안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안목이 없다면 위험하다. 개인이나 국가나.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는 구한말,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했고 또 일부 선각자들이 일깨워주어도 그들을 탄압했다. 기득권 세력이 그들의 풍요로움과 안온함을 위해 싹을 잘랐다.

문호를 개방하기에 자신도 없었고 겁도 났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역사의 과오는 범하지 말자. 지금은 세계가 한 지붕이라는 말이 허황된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 동시에 진행이 된다. 앞에서 내가 언급한 동시대란 말이 새삼스럽게 생각되어진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오늘의 국제정세에서 유럽은 그들의 자구책으로 EU를 구성하여 대응하고 있다. 한때 잠깐 숨죽였던 러시아가 용트림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일본이 뛰고 중국이 난다. 아세안 나라들이 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그런데 또 문을 닫아 걸어놓고 우리는 개방 못하겠다고 버틸 것인가? 예컨대 세계 여러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도 우리의 실정을 정확히 알고 정확히 대처하면 된다.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낼 시점에 왔다. 그에 걸맞은 의식 수준과 자존심을 갖추어야한다.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지도자는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자신이 그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면 용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애국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 그 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논어의 말씀과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씀이 새롭다.

개방성의 추구는 자신감의 발로다. 또 성숙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이기도 하다. 2천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은 로마의 역사를 <로마인 이야기>라는 장편의 역사 평설을 통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들여다보고 난 후의 소감은 한마디로 로마인에 대한 경탄과 찬양이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이야기 #로마인 #한나라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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