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송편 어때? 괜찮어?"

딸아이와 함께 나락이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을 걸었습니다

등록 2007.09.23 11:43수정 2007.09.2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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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고샅 앞의 논에는 나락들이 노랗게 익어갑니다. 추석을 쇠고 나면 곧 가을걷이가 한창일 것입니다. ⓒ 김현


여름 같은 가을입니다. 바다 건너 제주도는 태풍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피해액이 1000억원을 넘어섰다는 보도도 나옵니다. 황폐해진 한라산의 모습도 보입니다. 도민들은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며칠 안 남은 추석을 위해서 복구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타지에서 돌아올 자식들에게 불편한 추석을 맞이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어있을 것입니다.


어릴 적 추석은 늘 설렘이었습니다. 새 옷을 입을 수 있었고 맛보지 못했던 과일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적에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기회란 명절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부모님이 사다주신 옷은 주로 추리닝이었습니다.

추억을 만든 추석, 그리움만 새록새록

제 키보다 서너 살 위는 입을 수 있는 추리닝을 입고 우리들은 고샅길을 으스대며 걸어갔습니다. 소매와 바지를 두 번 세 번 걷어 올리고, 입에는 빨간 사과 하나가 물려있습니다. 아직 새 옷을 입지 못한 아이들은 부럽다는 듯 쳐다보았습니다.

“야, 너 옷 샀냐?”
“그려. 울 엄마가 쌤삥(새 옷)으로 사다줬당게. 넌 안 샀냐?”
“치! 야, 나도 곧 울 엄마가 사다준다고 했어야. 그런디 옷이 그게 뭐냐. 무신 푸대자루처럼 생겨 같고.”
“머시 푸대자루? 임마! 넌 이런 거라도 있냐. 부러우면 부럽다고 허지 먼 잔소리여.”


고샅에서 만나면 친구들은 주로 이렇게 이바구를 주고받으며 나도 혹시 새 옷을 얻어 입을까 하는 기대를 해곤 했습니다. 그땐 태권도라는 하얀 글씨가 쓰여 있는 추리닝 그 한 벌이 얼마나 가슴을 부풀게 했는지. 사과 하나도요. 지금이야 흔하디흔하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모두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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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이 대추를 딸아이와 함께 몇 알 따먹었습니다. ⓒ 김현


딸아이를 데리고 나락이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을 함께 걸었습니다. 논길을 걷다가 통통 하게 익은 나락의 낱알을 따 입에 넣고 이빨로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먹었더니 딸아이도 따라 합니다. 그러면서 ‘아빠 재미있다’ 합니다.

딸아이와 노랗게 익어가는 논길을 걸으며 내 어릴 적 모습부터 해서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보니 투사시인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인의 시 ‘추석무렵’이 떠오릅니다.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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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 김현

전남 해남이 고향인 김남주 시인이 어린 아들과 고향의 들길을 걸으며 이야길 하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순진한 아이의 말을 듣고 조금은 계면쩍게 주변을 바라보는 아빠. 그 아빠의 눈에 하얀 엉덩이를 까놓고 뒤를 보는 여인네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째지도록 웃는 초승달이 있습니다. 달과 엉덩이와 어린 아들과 아빠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풋풋하게 다가옵니다.

어린 아들에게 시인은 남도의 들길을 걸으며 무슨 얘길 해주었을까 궁금해집니다. 내가 딸아이의 손을 잡고 내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듯이 그도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오며 길가에 주렁주렁 열린 대추 몇 알을 따 나눠먹었습니다. 맛이 덜 들었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합니다. 대추를 먹으며 새해가 되기 전에 대추나무시집 보내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대추나무도 시집 가냐며 신기해합니다.

내가 만든 송편 어때? 괜찮어?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 푸른 풋콩 말아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어 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어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서정주

추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성묘와 송편입니다. 추석 때 다른 음식은 빠트려도 송편은 빼먹지 않고 합니다. 우리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 우리집의 송편 빚기는 다른 집과 좀 달랐습니다. 다른 집에선 대부분 여자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송편을 빚었지만 우리집은 남자들이 송편을 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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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를 들고 고샅에 나가 베어먹은 사과의 맛. 정말 그때 친구들과 나눠 먹은 사과의 맛은 기막혔습니다. ⓒ 김현


남자 형제만 넷이 탓에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돌아오면 어머니만 부엌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닌 늘 딸 있는 집을 부러워했지요. 할 수 없이 명절 전날엔 아들들이 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중 셋째인 나와 막내인 동생이 종일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었습니다.

“엄마, 우리 잘 하지?”
“그려 잘 한다. 내 새끼들.”
“내가 만든 송편 어때? 괜찮어?”

“너무 주물럭거렸다. 고로코롬 하지말고 요렇게 끝을 잘 마무리 해야 더 이쁠겨.”
“엄마 내껀?”
“어이구 녀석들. 잘 혔다 잘 혔어.”


이런 송편 빚기는 결혼하고도 몇 년 동안 더 이어졌습니다. 요즘은 아내가 자꾸 그만하라고 성화를 하여 그만두었지요. 대신 내 아이들이 할머니랑 송편을 빚으며 이런저런 정담을 나눕니다.

명절 전날,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일에서 해방이 되어 편하기는 한데 가끔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늙으신 어머니가 조금의 힘이라도 있을 때 옛날을 추억하며 이야길 나누고 싶기도 하고요. 하룻밤 안녕이라는 말이 있듯이 노인들의 건강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잖아요.

추석을 기다리는 마음에 단풍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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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무렵 감나무의 잎과 감을 보면 영랑의 시가 떠오릅니다. 특히 '오매, 단풍 들것네' 하는 어린 누이의 표정을 상상하곤 살짝 웃어보기도 합니다. ⓒ 김현


추석과 관련된 시 중에 좋아하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김영랑의 시입니다. 짧은 동시 같은 영랑의 시를 읽고 있으면 괜시리 미소가 돕니다. 어린 누이의 순진한 모습이 눈에 선히 들어와서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어린 시절 추석을 간절히 기다리는 나의 단풍든 마음이 담겨 있어서인지 모릅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지금은 나이가 먹어선지 아님 시대가 변해서인지 추석이 돌아와도 설렘은 예전만 못합니다. 그래도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면 얼굴도 가물가물한 깨복쟁이 친구들 얼굴이 생각납니다. 고샅을 휘젓고 다니며 놀던 친구들. 그 친구들도 지금쯤 고향 마을로 달려올지 모릅니다. 발걸음 아닌 마음으로요. 그러면 그 친구들의 마음에서 한가위라는 추억의 단풍이 곱게 물들 거라 봅니다.

올 추석은 날씨가 좋다고 합니다. 바람이 잦아 혹 궂은 날이 될까 염려하는 누이의 마음은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선 태풍으로 인한 난리로 추석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번 추석이 맑은 하늘에 뜬 환한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추석풍경>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추석풍경> 응모글입니다.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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