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기사 리뷰/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해냄)

등록 2099.12.31 00:00수정 2000.02.1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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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출판 관련 기사들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3종 이상의 일간지를 놓고 출판 관련 기사를 비교해 본 적이 있는가?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기자들이 선호하는 책과 독자들이 선호하는 책은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몇몇 눈에 띄는 공들인 기사(아마도 기자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되지만)를 빼고는 대체로는 심지어 책을 제대로 읽고 쓴 것일까를 의심할 만큼 무성의하다는 사실, 또 이 바닥에도 어김없이 '왕따'가 존재한다는 사실 등등.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얘기들은 출판계의 뒷골목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안주거리로 떠돌아다닐 뿐, 좀체로 공개적으로 이야기되지는 않는다. 일간지의 수명은 단 하루.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한 기사에 굳이 딴지를 걸 필요가 없다는 걸까.

물론 쏟아져나오는 신간은 하루에만도 수십 종. 게다가 출판면은 일주일에 한두 번. 일간지 출판면이 그 모든 책을 소화해낸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매일 수십, 수백 건씩 터지는 사건·사고를 신문의 지면이 모두 소화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듯이 새로나온 책이라고 모두 보도가 되어야 한다는 건 억지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 보도 가치가 높듯이 출판 기사도 마찬가지. 그런데 도대체 그건 누가 정하지? 하긴 편집권은 편집진의 고유 권한, 경영진이건 독자건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책임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책임을 묻는 장치는 있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이 지면에서 일간지의 출판 기사를 리뷰하려고 한다.

(이 연재 기사는 서점 '오늘의 책'이 발행하는 같은 이름의 소식지에 '출판기사의 숨어있는 1인치를 찾아라'라는 제목으로 매월 1회씩 연재되고 있으며, 현재 5회분까지 발표되었다.

앞으로는 오마이뉴스와 '오늘의 책'에 동시 연재를 할 계획이다. 다만 매월 1회는 오마이뉴스의 발행주기에 비추어 호흡이 너무 길기에, 나와 번갈아가며 같은 취지의 기사를 써줄 숨어있는 기자회원의 자발적 참여를 바란다. 꼭 출판이 아니더라도 문화전반에 걸쳐 예컨대 '영화기사의 숨어있는 1인치를 찾아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3-4명이 팀을 짜면 각자 한 달에 한번 정도의 부담으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이미 발표했던 글 중에 지난 9월에 출간된 박노해의 '오늘은 다르게'에 관한 내용을 약간 다듬어 우선 선보인다. 참고로 이미 발표된 연재분의 내용은 웹동인지 라이브http://live.shimin.net의 '동인 포럼'에서 볼 수 있다.)


옳지 않은지는 몰라도 아름답지는 않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박노해의 신간 '오늘은 다르게'에 대하여 한겨레에서 심지어 조선일보까지 모든 중앙 일간지(연합뉴스 포함)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단독기사로 대서특필이다.

게다가 무척 공들여쓴 흔적이 역력한 주례사(?) 일색이다. 그나마 한겨레(최재봉 기자)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 있음을 짤막하게 언급했을 뿐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소개되었음직한 비판적 접근은 어느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찬반 양론이 팽팽'한데, 모든 신문의 보도 태도가 한결같을 수 있는가. (그러니 결과적으로 한겨레의 기사는 '오보'인 셈이다. 언필칭 여론을 담지하는 신문들이 이럴진대 도대체 어디서 찬반 양론이 팽팽하단 말인가? 혹시 포장마차에서 조개구이 먹으며 술주정으로?)

더 신기한 일도 있다. 그래도 조금은 다른 시각을 보여준 기사를 굳이 지목한다면 조선일보(김광일 기자) 기사다. 역시 조선일보! 제 버릇 개 주랴?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게 아니다. 박노해의 '성찰의 깊이'를 소개하느라 입에 침이 마르는 여느 신문들과는 한 발짝 떨어져서 조선일보는 '분노가 끝나지 않은', '투혼이 이글거리는', '한번 더 젊어진' 등 다른 어느 신문에서도 볼 수 없는 낯간지러운 주례사를 늘어놓으며, '명상이나 성찰'이 아닌 '더욱 성숙하고 매운' 필봉을 요구하며 '안기부 지하 밀실의 짐승 같은 비명의 시간'이 '무모하게 탈색되어선 안 된다'고 다짐을 두고 있다. (사노맹 사건 때 입에 거품을 물던 그 조선일보 맞나?)

이 희한한 이구동성의 비밀은 의외로 간단하다. 박노해의 신간이 아니라 박노해가 이미 상품이다. 특정 매체에 독점 판매권(?)이 설정돼 있는 것도 아닌데, 잘 팔리는 상품을 못 갖다 파는 게 바보다. 박노해의 '변신'은 뉴스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은 막말로 '노상 해오던 소리'니까 뉴스가 안 된다. 언필칭 '신문(新聞)' 아닌가.

조선일보의 의외의 태도도 그 연장선에서 설명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기사에서 잊지 않고 소개해 준 대로, '더이상 지는 싸움은 하지 않고' '돈이 되는 운동'을 '즐겁게' 하고 싶다는 박노해는 이미 반쯤은 소원 성취 하고 있다. 적어도 '시장'에서 '이기는 싸움'을 하며 '돈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즐거운지야 모르겠지만 즐겁지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그런 '선언' 따위는 사실 불필요한 첨언이다. 그러니까 조선일보의 말인즉, 그런 하나마나 한 헛소리(?)는 집어치우고(흥미롭게도 조선일보 기사는 위의 세 가지 운동관을 소개해 주지 않고 있다) 상품의 역할에나 충실하게 계속 뉴스거리나 만들어 내놓으라는 뻔뻔스러운 주문이다.

다시 말해 박노해가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변신'에 성공해 버리면 그의 상품성은 반감한다. 그가 어떤 언행을 하든 여전히 '과거의 혁명가'여야만 항상 신선하게 상품성이 유지될 수 있다. 래서 조선일보는 아직 더 팔아먹을 만한 상품이 성급하게 '탈색'(!)되지 않도록 '과거의 혁명가'라는 이미지를 리마인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문에서 빠짐없이 언급된 박노해의 핵심 메시지는 '386세대와 N세대의 접속'. 기실 '옳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을 주목하자는 이 메시지는 그냥 가볍게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아주 중요한 착안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박노해식의 '이기는 싸움', '돈 되는 운동', 다시 말해서 모든 신문의 이구동성은, 오히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말하기는 곤란한 문제지만, 적어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한 목소리를 아름답게 여기는 건 전체주의자들뿐이다.

(조선일보에 한 말씀. '옳음'보다 '아름다움'에 주목하자는 메시지가 정치면의 극우와 문화면의 사이비진보를 버무리는 편집을 정당화해 주리라는 기대에서 박노해에게 갈채를 보내는 것이라면 큰 오산이다. 착각하지 말지니, 당신들은 이미 '옳지 않을'뿐더러, 더더욱 '아름답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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