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웃을 수 없는 나날들...... 재혁이 아빠는 지금

씨랜드참사 1주기, 부모들 '어린이안전재단' 만든다

등록 2000.06.27 10:56수정 2000.06.2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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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그 날을 그는 잊을 수 없다.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됐을 아들 재혁이(당시 7세)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빠 이경희(48)씨는 목이 메인다.

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수련원에는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유치원에서 수련회를 갔던 아이들 19명은 콘테이너를 개조한 시설에서 아무런 보호조치 없이 잠을 자다가 참변을 당했다. 1년 전 아이들의 어이 없는 죽음 앞에 전국민은 경악했다. 분노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가족 편지/엄마는 오늘도 송이를 불러본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라는 곳에서 수사원인을 무엇이라고 발표한 줄 아십니까. 모기향을 아이들이 발로 차서 불이 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는 유가족들에게 재수사, 추모비 건립, 관련 법규 정비 등을 직접 약속했지만 모두 공문구가 돼버렸구요"

서른 넷에 결혼해 마흔이 돼 얻은 아들이 허망하게 죽은 것을 생각하면 이경희는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재혁이 엄마가 97년도에 암으로 죽었어요. 엄마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며칠 신경만 안써줘도 손톱이 자라서 손톱 밑에 때가 시커멓게 끼는 거예요. 엄마 없이 자라는 재혁이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제 마음대로 안 되더라구요."

엄마가 없어 유난히 아빠를 더 찾던 아들 재혁이가 생각나는지 이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경희 씨는 지난 5월이 참 힘들었다. 어린이 날인 5월 5일도 그렇고, 재혁이의 생일인 5월 17일도 그렇고. 남들은 5월이 제일 바쁘고 즐거운 달이라고 한다지만 이씨에게 5월은 너무 힘들 한달이었다.

아들 재혁이를 참사로 잃은 이경희 씨는 이 일로 인해 이전까지 하던 가락시장 장사도 그만뒀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인 두 딸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두고 그는 '씨랜드 화재참사 유족회' 부회장을 맡아 유족회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장사가 손에 잡혀야죠. 정부에서는 사건진상규명도 제대로 안 해주지 관련자 처벌은 미온적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고등법원 항소심에서 1심에서 구속됐던 10명 중에서 7명이 모두 풀려났어요. 그래서 수사 자료를 모아 4월달에는 '씨랜드 참사 백서'를 만들어서 고등법원에 제출했어요. 결국 결심공판에서 총5명이 법정구속이 되더군요"

씨랜드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유족회를 중심으로 매달 모임을 갖고 서로의 안부도 묻고 어려운 일을 함께 의논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엄마, 아빠의 삶까지 변화시켜 놓았다. 아이들을 보내놓고 마음대로 크게 웃고 떠들 수 없는 이들에게 유가족들이 유일한 의지가 되는 이웃이다.

술을 먹어도 유가족들과 먹게 되고, 혹 웃을 일이 있어도 이들과 함께 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이렇게 부모들의 삶마저 바꾸어 놓았다.

이씨는 지금 다른 유족회 회원들과 지금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가칭)'씨랜드 천사의 손 안전재단'이 그것이다.

제2의 희생자를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힘이 되보자는 뜻에서 추진하는 일이 바로 '안전재단' 설립이다.

유가족들도 맨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자꾸 아이들 일을 들춰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아이들 죽음에 대한 진상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돕는 일을 한다는 일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안전재단이 설립되면 어린이 예방대책 등을 책자로 만들어 관내 유치원에도 배포하고 사전예방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년에 0세에서 14세까지 어린이 1836명이 사고사로 사망한다고 합니다.(자연사 포함 4457명) 씨랜드 화재 사건 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유가족들이 추진하는 안전재단이 설립이 계기가 돼서 제2, 제3의 씨랜드 참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유족회는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모아서 6월달에는 송파구 문정동에 새롭게 사무실도 마련했다. 행정자치부와 보건복지부에서 신청한 '안전재단' 설립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본격적으로 활동을 진행할 계획이다.

문정동 사무실은 유족들이 수시로 찾아오는 쉼터 역할을 한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권형수(당시7세) 아빠와 배한슬(당시6세) 아빠가 찾아와서 유족회의 이런 저런 일들을 거들고 있었다.

6월30일 오전 10시 씨랜드의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1주기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유가족들이 씨랜드가 있었던 화성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탓에 행사는 1년전 영정이 모여 있던 강동교육청에서 진행된다.

'씨랜드 화재참사 희생자 유가족 홈페이지''씨랜드 사건 시민의 모임'에서는 온라인으로 씨랜드 진실규명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진행 중이다.

문정동 사무실 한 면에는 19명이 사건 발생 5시간 전에 해변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그 사진 아래 국화 몇 송이와 엄마, 아빠의 글을 모은 책 '이제는 해가 솟는 넓은 세상에서 살아라'(도서출판 넷서스)가 놓여 있었다.

"이제는 해가 솟는 넓은 세상에서 살라"는 엄마,아빠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하는 듯 19명의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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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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