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운동 1세대 박영숙 소장

박영숙(朴英淑)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

등록 2001.03.08 15:52수정 2001.03.0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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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뽑아 살인한 자는 자기 손으로 그 칼을 집어넣지 못하고 남의 손에 의해 뺏길 때 비로소 손에서 놓게 됩니다. 박정권도 제 손으로 칼을 칼집에 넣지 못했고, 칼을 뽑아 더욱 많은 피를 흘려 정권을 잡은 전정권은 그 칼을 점점 더 갈아 후회했습니다. 현 정부는 전정권이 뽑은 칼을 그대로 인수하여 휘두를 것입니까? 아니면 그 칼을 칼집에 꽂으렵니까?"

이 글은 집회 단상 위에서 연설하는 연사의 글도, 혈기왕성한 대학생의 투서나 대자보가 아니다. 한강을 오염시키는 최악의 경우는 국회의원이 빠졌을 때란 우스갯 소리의 주인공인 현직 국회의원의 글이다. 정확히 말하면 제142회 임시국회 사회·문화부문 대정부 질의의 한 대목이다.

제13대 국회 단 6명의 여성의원 중의 한 명, 한국 여성운동의 태두(泰斗), 90년대 들어서 꽃피운 사회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현존하는 사회운동 1세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여성, 박영숙(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69) 소장을 만났다.

고희(古稀)에 가까운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고운 선이 그대로 남아있고, 또렷하고 힘이 있는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여성환경연대, 결식아동돕기, 환경·사회·여성 관련 각종 세미나 개최, 한국여성기금 모금 등 다양한 사회활동에 임하면서도 짧은 시간동안 보여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생활의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진정 아름다운 여성이란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 소장님은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소장님의 사회활동은 여성분야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 사회운동을 하게 된 배경과 동기는?

"저의 대학시절은 50년부터 55년까지입니다. 당시 김활란 박사님이 YWCA를 창시했을 때, 전 YWCA 초창기 멤버였죠. 6·25동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교육시설 복구 및 모자란 교사 수를 대처하기 위해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왔어요. 이것이 기독학생운동이 태동하게 된 배경입니다. 저는 자연스레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죠. 자원봉사로 시작해 나중엔 휴학하고 교사생활을 1년정도 했었습니다. YWCA가 저의 첫 직장이였습니다. 주변여건이 나를 이끈 건지, 나의 의지가 환경을 만든 건지 지금도 알 수 없어요."

- 사회운동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했는데요, 사회운동과 제도권에 편입된 후 다른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회운동가와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

"저에게 정치는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저 또한 정치를 염두에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초기 YWCA에 몸담고 있을 땐 순수하게 여성운동에만 전념했었습니다. 70년대로 오면서 자의든 타의든 인권운동에 가담했습니다. 데모를 하다 청량리경찰서에 잡혀간 아이들이 발가벗긴 채 앉아라, 서라를 시켰다는 소식(84년)을 듣고 14개 여성단체 대표가 모였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전부터 있어온 해고노동자 문제 등에 대처하고, 권인숙양 사건 때는 대책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잇달아 박종철군과 이한열군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일에 매달리다가, 평민당에서 민주화여성단체연합회으로 대표파견 요청을 받은 것이 정치입문 계기입니다.

당시 시민단체에서 정부나 국회에 안건을 건의하는데 있어서 문제해결의 한계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도권 편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겨우 싹트기 시작한 시민운동을 지켜야 할 사람도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결국 저가 추천됐습니다. 자원이 아니였고, 정치에 대한 의욕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되었건, 여성의 정치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내 자신의 어려움을 피해 물러서기보다는 주어진 책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한 태도라 결론 짓고 입당을 결심했습니다.

제13대 국회에 임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다도 한 맺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들려주고, 그들의 한을 정치권에서 풀어줌으로써 함께 평화롭게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제142회 임시국회에서의 대정부 질의에서, 민주화를 요구하여 목숨을 끊은 청년학생들 문제, 장기수 문제, 삼청교육대 문제, 윤락여성 문제, 최루탄부상자 문제, 고문 문제, 보호감호처분 문제, 산재직업병 문제 등 많은 사람들의 한이 된 문제를 지적하여 문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가장 보람있는 일은 동일가치의 노동을 하고서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휠씬 낮은 임금을 받아온 여성차별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명문화한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145회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킨 것(89년)과 37년간 여성의 숙원이었던 「가족법」을 개정된 일(90년), 제85차 IPU 총회 한국대표단 고문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91년) 등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고희(古稀)에 가까운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처음으로 여성차별을 느낀 것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기독교연합회(NCC)에서 여성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할 때입니다. 많은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여성에 대한 편견에 놀랍습니다. 저의 의견과 행동은 여자라는 틀속에서 다시 맞춰지길 바라는 분위기였어요. 저가 여자라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깨닳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가 겪은 여성차별은 일반여성이 고통받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알려진 대로 저의 고향은 평양입니다. 평양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번창한 곳이죠. 따라서 남녀차별이 다른 지방에 비해 부모님께서도 기독교 신자였고. 7남매 모두 남녀 구별없이 평등하게 자랐습니다. 모교인 평양의 정의여중과 이화여대도 미션스쿨입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한(恨)이나 고통 때문에 여성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조차 하나의 편견입니다. 사회부조리와 편견, 소외받는 사람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은 냉철한 사고와 열정을 가지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85년도에 이경숙이라는 여성이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보험회사가 지급한 손해배상금의 내역입니다. 퇴직연령을 25세로 규정하고, 은퇴후의 보상금을 하루 4천원으로 계산했던 겁니다. 이 일은 많은 여성들을 분노케 했고, 법정투쟁을 불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사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경향은 사법부도 보험회사에 뒤지지 않았지만, 여성들의 끈질긴 반증으로 재판결과는 승소판결이 났습니다. 당시 사법부의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은 평범한 주부에서 전문직 여성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성이였습니다. 여성운동은 여성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특정한 계층이나 개인적인 동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약한 사람, 소외받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실천에 옮길 뿐입니다. 잘못된 것, 삐뚤어진 진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저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죠."

- 몇몇 시민단체의 불미스런 일로 인해 시민단체의 도덕성이 의심받고, 민주주의에서 제5부라 불리는 시민단체의 횡포에 대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1세대 사회운동가로서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언론에 거론됐던 장원 씨는 개인적으로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 만큼 생태학 관련 운동에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불미스런 일은 무슨 오해가 있을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동을 하다 보면 개인적인 감정이 생길 수도,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재판의 결과가 나오면 시시비비가 가려지겠지요. 장원 씨나 상대 여성 모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시민운동이라는 큰 틀로 보면 모두 필요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서 확고한 의지로 생활고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민운동이 시민에게 호응 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 부분의 잘못을 전체의 잘못으로 매도하여 조직의 가치와 도덕을 추락시켜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저력을 보여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애썼던 시민운동이 이제야 꽃봉오리를 만든 것과 같습니다. 어렵게 조성된 분위기가 개인의 잘못으로 와해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의 성숙된 의식이 필요합니다. 시민단체는 개개인이 모여 만들지만, 시민단체의 힘은 개인이 아닌 단체 즉 조직에서 비롯됩니다. 그동안 성숙된 우리나라 시민의식은 충분히 한사람의 도덕성이 단체의 도덕성이 아니란 것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민단체는 이번 일을 자성과 재충전의 계기로 삼아야 겠죠."

- 현재 계획하고 계신 일이나, 향후 염두해 두고 계신 일은 무엇입니까 ?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다만 나이든 여성으로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힘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난 98년부터 시작해 온 「사랑의 친구들」이란 결식아동 돕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원래 영부인이 맡아야 할 일인데 너무 바빠서 제가 맡고 있어요. 영부인과는 여성운동 선후배 사이로 여러 일을 함께 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한국여성기금추진위원회」도 함께 하고 있죠. 「한국여성기금」은 여성시민단체의 재정난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1천억이 목표인데, 지금까지 모아진 기금은 21억원 입니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까, 할 수 있는 데 까지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 박영숙 소장 주요약력 ■

1963 02 YWCA연합회 총무
1970 02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1987 11 평민당 부총재(총재권한대행)
1988 04 13대 국회의원(보건사회위원회)
1991 04 제85차 국제의원연맹 한국대표단 고문(평양)
1992 04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1992 07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
1995 11 서울특별시 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장
1998 08 사단법인 사랑의친구들 총재
1999 12 재단법인 한국여성기금 이사장

덧붙이는 글 ■ 박영숙 소장 주요약력 ■

1963 02 YWCA연합회 총무
1970 02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1987 11 평민당 부총재(총재권한대행)
1988 04 13대 국회의원(보건사회위원회)
1991 04 제85차 국제의원연맹 한국대표단 고문(평양)
1992 04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1992 07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
1995 11 서울특별시 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장
1998 08 사단법인 사랑의친구들 총재
1999 12 재단법인 한국여성기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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