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무신'에 새긴 민주화 50년

[출판기념회 풍경] 계훈제 선생 사진첩에 박힌 민주투사들

등록 2002.03.22 11:40수정 2002.03.2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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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계훈제 선생의 부인 김진주 여사. ⓒ 오마이뉴스 이종호

두 달 전쯤이다. 계훈제 선생이 민주화운동보상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을 듣고 방학동으로 부인 김진주 여사를 찾아뵌 적이 있었다. 작년 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계훈제 선생의 죽음이 민주화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금 지급 기각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가족이 행정소송을 하자 2002년 2월 25일 위원회는 보상금 지급은 여전히 거부했지만 부랴부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이 사건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전혀 뜻밖"이라고 의아함을 표시했고,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 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고는 "그들이 과연 계훈제 선생을 평가할 위치가 되느냐"며 분노를 표현했다.

사진 속의 사람들

3월 21일 오후 7시 세종문화회관 1층 세종홀에서는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화환도 없었고, 시끌벅적한 축하도 없었다. 대신 단상 앞에 걸린 사진 속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100여 명의 청중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계훈제 선생.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가 평생을 신고 다닌 흰 고무신 한 켤레를 기억하며, 80평생을 한결같이 조국의 독립과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살다간 그의 발자취를 기억하며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흰 고무신-계훈제, 미완의 자서전>(도서출판 삼인) 출판 기념회에서 과거의 민주투사들은 그렇게 모였다.

▲<흰 고무신>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부영 의원, 고은 시인, 장영달 의원.(사진 오른쪽부터)
ⓒ 오마이뉴스 이종호
<흰 고무신>을 펼치면 20여페이지에 걸쳐 빛바랜 사진들이 등장한다.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백기완, 이소선, 박형규, 성유보, 김승훈, 진관. 어디 그뿐인가. 김대중, 이부영, 장영달, 이해찬, 김병오, 이재오. 모두 거기 사진 속에 있다.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계훈제 선생과 함께.


사진 속의 인물,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원로가 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계훈제 선생은 철철이 왔다가 훨훨 떠난 것이 아니라 인연을 남겨두고, 흰 고무신 하나 남겨두고 떠난 분입니다. 우주는 빈터입니다. 우리 몸에 1조개가 넘는 미생물이 있다지만 우주공간은 빈터입니다. 하얀 백지와 같은 빈터. 답답하고 설글픕니다. 개고기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백기완이 보다 계훈제 선생은 개고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닭고기도 무척 잘 드셨지요. 그런데 제가 단 한 번도 개고기 대접, 닭고기 대접도 못했습니다. 흰 고무신 앞에서 한마디하겠습니다. 형님 살아만 돌아오십시오. 개고기와 닭 한 마리에 소주 한잔 대접하겠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박형규 목사는 <흰 고무신>을 펴놓고는 과거를 회상했다.

"책 속의 사진을 보면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역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역사가 거기에 있습니다. 87년 6월 10일 항쟁 대회 진행을 함께 준비하던 사진이 있더군요. 그 날 이후 우리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6.29를 맞았습니다. 그 속에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했죠. 거기서 '갈라서지 말자, 우리가 갈라서면 망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결국 양 김이 갈라서더군요. 선생은 평양냉면에 불고기를 좋아하셨지요. 제가 몇 번 대접해 드렸는데 얼마나 맛나게 잡수셨는지…. 그 때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고은 시인은 장편의 시를 읊조리듯 계훈제 선생을 추모했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을 우리는 따라왔습니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을 우리는 함께 걸어왔습니다. 어느 때는 늦게 동참하고, 어느 때는 일찍 동참했다가 일찍 떠났지만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하루도 변함없이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1940년대 평양 비행장을 폭파하러 가던 그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항심(恒心)을 걸어온 분이 오늘 밤 우리가 기리는 사람입니다.
서평 -<흰 고무신>
산부인과에 숨어 들어간 수배자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쫓겨 한 시국사범은 이집, 저집을 전전했다. 당시 현상금 500만원. 그를 숨겨준 사실이 들통나는 즉시 보안사 분실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전전하다 무작정 찾아간 병원. 그러나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수배자는 4, 5일이 지난 뒤에야 자정 넘어 들리는 여자에 신음 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곳이 산부인과 건물임을 알았다.

<계훈제, 미완의 자서전 -흰 고무신>에 소개된 1980년의 기억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계훈제 선생이 생전에 <씨알의 소리>에 발표한 글과 자서전을 염두에 두고 육필로 남긴 원고, 메모와 일기 가운데서 가려 뽑은 것들이다. 이 글들 속에는 그가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삶의 태도와 그 속에서 겪었던 인간적 고뇌들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이 기록들은 그대로 하나의 역사다. 일제 말엽 조선민족해방협동단 관련 증언, 6·25피난수기,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 도피 수기 등 그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 생동감 있게 전해온다.

특히 평생을 민족, 민주, 통일을 위해 살았던 투사가 인생의 종착점을 앞두고 써내려간 책 마지막 부분의 육필일기는 가슴 한편을 쓸쓸하게 울린다.

"아내가 밤새도록 옆을 지킨다. 나는 조국을 택하느냐 가족을 택하느냐 옆눈질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조국을 택했다. 태양이 우주를 환하게 하는 것처럼 조국의 환함을 택했다. 가족은 엉망이 되었다. 보상받을 길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음은 든든했다. 이제 1945년 8·15의 그 날이 돌아온다. 모든 것을 들어 이를 축하하여야 한다"
1997년 8월 12일 일기 中
오래된 이름들이 섞여서 모여서 없기도 하고, 있기도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단추 5개 달린 누런 저고리. 발 밑에 오래돼서 바랜 흰 고무신을 신고 거기에 계셨습니다."

과거 계훈제 선생과 동지였던, 그러나 지금은 현실 정치인이 된 이부영 의원, 장영달 의원, 장기표 푸른정치연합 창당준비위 대표 등의 얼굴도 눈에 띠었다.

계훈제 선생이 병으로 누워 있을 당시인 1997년 돈 5만원과 청량제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던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의 부친과 모친. 그리고 그밖에 민주화를 위한 유가족들이 이날 자리를 함께 했다.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계훈제 선생의 부인 김진주 여사는 요즘 한 가지 고민에 빠져 있다.

"저희가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너무 억울해서 한 일이었는데, 보상금 지급받자고 위원회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계훈제 선생과 함께 민족, 민주, 통일은 위해 투쟁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작업복과 흰 고무신 하나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킨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를 모르고 민주화 운동을 말할 수 없다고 <흰 고무신> 속의 사진들은 말하고 있는데, 그 가족들에게 행정소송의 멍에를 지워야 하는 오늘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고 계훈제 선생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는 박형규 목사.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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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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