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달 선배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신당 논의가 지지부진한 이유

등록 2003.06.30 11:47수정 2003.06.3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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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배님

장마철입니다. 장마비처럼 끈끈하고 후덥지근한 게 요즘 정치권 아닌가 싶습니다. 여야 모두 신당이 주 관심사인데 막상 국민은 냉소적입니다. 시청률이 예상보다 낮게 나타나자 막을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주말 연속극 같습니다. 신당 논의는 활발한데 민생은 뒷전입니다. 실물 경기 회생과 청년 실업 지원 등을 위한 4조원 규모의 추경 예산안은 한달 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펜을 들게 된 것은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입니다. 고향과 정치권의 후배로서 드리고 싶은 말도 있습니다. 항간에서 내년 총선에서 저와 장 선배의 관계를 잠재적 라이벌로 묘사하고 있어 다소 부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질문과 제언은 어쩌면 민주당 신주류 의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분이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호남출신 신주류 온건파’라는 구체적 집단을 대표해 청취하시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첫째로 신당 논의가 이렇게 쪼그라들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점입니다. 자기 희생 없는 신당 논의는 결국 논의 자체를 주도권 다툼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아시다시피 민주당의 신당 논의는 이제 신주류가 구주류에 국민참여형 경선을 제안하고 구주류는 이에 맞서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경선 제도를 반대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형 경선이란 당원과 일반 국민이 50%씩 참여해 공직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저는 작금의 신당논의가 이렇게까지 후퇴하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후퇴라는 표현을 썼는데 분명 후퇴입니다. 지난 2월 10일 당 개혁특위에서 잠정 합의한 안에 따르면 공직후보 경선은 상향식 국민참여경선과 완전개방경선 두 가지를 적시하고 상황에 따라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지난 4·24 재보궐 선거가 끝났을 때 흔히 얘기하는 구주류라는 사람들도 이러한 당 개혁안을 수용할 뜻을 비쳤습니다. 그런데 신주류는 신당 창당 논의로 국면을 변전시켰고, 결국 2개월이 넘는 항해 끝에 국면은 두 가지 공천방식 중 덜 개혁적인 안을 구주류측에 수용해달라고 당부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신당은 만들지도 못했고, 공천 방식은 덜 개혁적인 안의 관철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명백한 후퇴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전체 신주류 선배들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만일 4·24 이후 국면에서 신주류 핵심들이 천정배 의원처럼 지구당 위원장직을 던져버리고 신당 창당에 나섰더라면 어땠을까요. 지도자, 창당자금도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 명분 하나라도 올곧게 만들어나갔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신당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선배님들의 헌신과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왕적이라는 평을 듣는 지구당위원장 직을 던져버리고, 현역 의원으로서의 기득권을 던져 버리고 시작했더라면 달라졌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장 선배님

둘째로 저는 50대 50의 국민참여형 경선이라는 게 과연 타당한 개혁안이라고 진정 믿으시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지난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호남은 김대중, 노무현 후보에게 90%가 넘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전체 투표 참여자의 90%가 넘는 국민들이 특정 후보에게 투표하는 상황에서 당원과 비당원의 구분이 정치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는 견지에서 말씀드리면 적어도 호남 지역의 경우 당원은 현역 위원장과 가까운 사람들이고, 비당원은 그렇지 않은 사람, 현역 의원과 이런저런 이유, 예컨대 지방선거 공천 등의 문제로 싸운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민주당 호남 지구당의 경우에도 활성화된 당원은 각각의 지구당마다 200-300여명에 불과합니다. 위원장과 함께 숨쉬는 이 사람들이 실질적인 당원입니다. 그리고 진성 당원 문제가 대두되니까 바로 이 200-300명의 당원들이 앞장서 ‘경선용 진성당원’을 모집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50대 50의 비율로 경선을 치르자는 것은 100m 경주를 하는데 현역 위원장은 50m 앞에서 출발하고, 신인들은 100m를 완주하라는 말에 다름 아닌가요. 정말로 개혁적이라면, 호남 지역 같은 특정 지역, 법률적 용어로 정리하자면 ‘지난 몇 차례의 전국 선거에서 우리 당이 50%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지역’에서는 완전 자유 경선을 실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혹 지금의 50대 50 경선안은 구주류와의 결별을 기정 사실화해놓고 신당 창당 후 이 제도를 채택, 현역 의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리 복선을 깔아놓는 것 아닙니까. 개혁이라는 명분과 기득권이라는 실리를 동시에 움켜쥐기 위한 방안 아닙니까.

아울러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신구주류의 협상은 있으되 민의는 실종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공천 방식 협상에 앞서 그 흔한 여론조사라도 한번 실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공천 방식 결정은 꼭 현역의원, 위원장만의 일은 아닙니다. 가급적 여론과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수구보수라고 비하하는 한나라당도 최병렬 대표의 선출을 계기로 정치관계법 개정안의 결정권을 여야 정치권만이 아닌 시민단체, 학계, 언론계 인사가 참여하는 범국민정치개혁특위에 맡기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고양이들끼리 생선 분할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는 게 최 대표의 생각 같습니다.

장 선배님

이제 신주류 전체가 아닌 장 선배님 같은 흔히 온건파로 불리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부분입니다. 오늘 아침 지방 신문에서도 선배님은 ‘신당은 찬성하나, 분당은 반대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른바 신당의 핵심으로 보도되는 분이 새삼 신당을 찬성한다고 해서 좀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그건 그렇다 치고, 분당은 반대한다는 표현에서 저는 정말로 당을 걱정하는 마음이 우선 읽혔습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분당 반대에서는 또 다른 정치적 계산도 읽혔습니다. 바로 또다른 측면에서 명분과 실리의 동시 확보입니다. 제 나름의 아전인수식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일부 호남 의원에게는 지금의 국면이 대단히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처럼 중앙당에서 공천하는 방식이면 훨씬 편합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다는 의원들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창업 공신으로서의 프리미엄도 있으니 재공천은 훨씬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구나 경선은 익숙치 않은 제도입니다. 지금까지 호남 유권자 층은 중앙에서 정해진 공천자에 대해 인기투표를 하는 존재였지 감히 국회의원을 원점에서 선출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90%이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경선과 분당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재료가 새로 나타났습니다. 호남의 일반 유권자 처지에서 경선과 분당은 2차에 걸친 경쟁, 선택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88년 평민당 선거 때부터 기호 2번 후보에 대해 O, X 딱 한번만 선택해야 하는, 그것도 답은 다 정해져 있는 선거를 치르다가 이제 사지선다형으로 두 번(당내 예선과 본선) 선택하게 된다니까 지금 호남에서는 유권자들이 신이 났습니다. 모두들 내년 4월을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현역의원들은 죽을 맛이지요. 그래서 한번이라도 선택기회를 줄이는 게 편합니다. 구주류는 경선에 반대하고 신주류는 분당에 반대하는 숨은 이유는 그것 아닌가요.

솔직히 지금 호남의 일반 민심은 대체로 구주류에 좀 더 기울어 있습니다. 구주류가 뭘 잘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신주류와 노 대통령이 좀 못해서입니다. 유권자들은 “우리가 뭘 잘못했냐, 노무현 찍은 게 잘못이냐, 호남을 다소 잃더라도 영남에서 의석을 건지겠다는 발상은 누구 것이냐, 경제는 왜 이렇게 어렵냐, 김대중 전대통령이 불쌍하다”는 게 좀더 유력한 여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개인의 생각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전면 분당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쪽입니다. 신주류는 호남표가 필요하고 구주류는 여당이라는 아랫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신주류와 구주류는 상호 적대적 의존관계라고 정의해봅니다.

요새 전주에 파묻혀 사느라고 선배님들이 이별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저는 전면 분당은 좀더 감정의 숙성과 실리의 계산이 끝난 뒤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난 5년 동안 꼴보수 인사들과 함께 야당한 것도 억울한 데 앞으로도 5년간 다시 야당을 하라니 앞길이 막막한 몇몇 한나라당의 개혁성향 의원들이 탈당을 실행할 것 같습니다만 그 분들의 가세로 판이 크게 달라질 지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수도권 호남표의 이탈을 상쇄할 정도로 다른 성향의 표들을 몰아온다면 전면 분당 상황이 오겠지요. 그렇다 해도 호남 유권자들은 여전히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 선배님께 묻겠습니다. 혹 분당이 된다면 지금까지의 신주류 행보를 접고 당에 잔류하는 것도 검토 중이신가요? 아니면 한나라당 의원들의 가세로 민추협 세력이 재결집할 것 같으면 분당을 수용하시겠습니까?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장 선배님

지금은 신당 추진세력이 좀더 강력하게 개혁의 명분과 소신을 지켜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신구주류라는 패 가르기를 떠나 진정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사랑을 받는 신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좀더 과감해야 합니다. 정치는 소신과 명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신당 논의는 이것이 없습니다. 무작정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구상으로 시작해 지금은 구주류라는 현실 안주 세력과 협상을 통해 타협하고자 하는 게 신당 논의의 현주소입니다.

신주류부터 기득권을 버리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국민이 찬동하는 개혁안을 제시하고 나갈 때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구주류라는 분들을 완화된 개혁안이라는 당근으로 설득하려 하지 마시고 정치개혁에 대한 소신과 명분으로 견인하십시오. 그리고 이에 앞서 갖고 있는 것부터 버리십시오. 그게 세상과 시대를 낚는 큰 사냥꾼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평민당 창당 이후 지금까지를 돌이켜 보면 그때는 소신과 명분 하나로 정치하지 않았던가요. 혹 그 동안 우리는 너무 배부른데 익숙해진 것 아닌가요? 언젠가 작가 박완서 씨가 담요 하나, 옷 한 벌, 숟가락 하나 차림으로 티벳 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너무 가져서 탈”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혹 우리는 지난 십 몇 년간 정치적 오두막에서 출발해 이제는 중대형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그걸 당연시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민주당 사람들은 지구당 위원장, 현역 의원, 여당이라는 3가지 프리미엄을 당연시하는 정당과 정당인이 된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원외인 저도, 혹 법적으로는 무소속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인 처지에서, 제가 뭘 좀 더 버릴게 없을까 궁리해보겠습니다.

긴 글, 재미없는 글, 때로 무례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밤에는 좀 뒤척일 것 같습니다. 오늘 신문 보니 외국 방문길에 나섰던데 모쪼록 건강히 귀국하시길.

2003년 장마철에 접어든 전주에서 김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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