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전시장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었다"

[인터뷰] 노암갤러리에서 전시회 중인 젊은 조각가 유진영

등록 2004.06.07 00:39수정 2004.06.0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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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던 친구를 두 번째로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인사동으로 초대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로 미술 관람은 꿈도 꾸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러던 차 인사동을 훑기로 했습니다. 아주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 첫번째 장이 유진영 작가의 첫 개인전시회장인 노암갤러리였습니다. 2층 그림을 보고 좁은 계단을 오르니 보통 사람 키의 두 배 반 정도의 철제 침대 위에 비닐인간이 속을 다 드러낸 채 누워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지 않았다 해도 그 침대 밑으로 떨어져 쌓여있는 비닐 조각들은 영양가가 다 빠진 앙상한 잎맥인간의 참 모습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습니다.

그 때 갸름한 여자 한 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작가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의 첫 개인전이었습니다. 관람이 어색한 친구는 팸플릿을 쥐고서 방명록 한 자 쓰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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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 Leaf.life 1 ⓒ 유진영

<작품 1>을 지나 섬세하게 조각한 비닐문이 이어진 길을 통과하니 방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방엔 직접 주워다 조각했다는 작은 잎들 속의 인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이미지는 비닐이라는 소재로 인해 차가운 것이어서 냉정함을 느꼈지만, 갈수록 그 비닐인간과 비닐문을 통과하는 내 모습, 잎사귀 속의 인간 형상이 비정한 현실 속의 현대인 같아 따뜻하게 안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 손이 잡고 싶었는데, 차마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첫 전시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나왔을 때, 친구는 그랬습니다.

"그 작가 손 봤어? 여자 손이라고 하기엔…, 그러니까 저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지. 사람의 솜씨가 아니야."

유진영 작가와의 인터뷰.

- 개인전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준비하면서 든 생각과 지금 전시 중에 관람객과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어떤가요?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일반적인 미술전시와는 차별을 두고 싶었습니다. 작품을 그냥 둘러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과하고, 만지고, 작품과 사진도 찍고, 관객이 전시장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섬세해지고 유심히 볼수록 다양한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를 하면서 많은 관람객과 대화를 했습니다. 저 스스로는 작품의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생각했지만, 관람객들의 돌발적인 질문들과 감상을 들으면서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고 관람하는 관객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비닐이라는 소재가 섬세함을 드러내기엔 다소 딱딱하고 힘이 들 것 같은데, 소재를 비닐로 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비닐은 얇습니다. 그 얇은 재질이 여러 겹 겹쳐지면서 잎맥의 복잡함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투명한 비닐들이 300겹 겹쳐지면서 불투명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현상과 그 덩어리가 마치 얼음같이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 끌렸습니다. 침대 위에 잎맥만 남은 사람이 얼음처럼 차갑게 누워있는 형상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 삼백 장이 넘는 비닐에 인간의 형상을 하나하나 세포를 만들어내듯 섬세하게 조각한 것이 놀랍습니다. 가장 보람된 시간과 그렇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면 어떤 때였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6m나 되는 복잡한 모양의 비닐을 한 장씩 오려낸 것에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비닐을 칼로 자르는 일은 제게는 유희처럼 느껴져서 힘든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작품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6m나 되는 비닐을 1mm의 오차도 없이 도면 위에 펼치는 일이었습니다. 완성 작에서 300여 장의 비닐을 똑같이 쌓기 위해서는 약간의 오차도 없어야 했습니다. 비닐의 앞뒤가 안 맞거나 제대로 깔리지 않으면 비닐을 다시 말아서 깔아야 했습니다. 6m의 비닐 한 장을 제대로 깔기 위해서는 50m 이상의 거리를 왔다갔다하면서 맞추어야 합니다. 그 점이 참 힘들었지요."

- 침대에 누워있는 커다란 사람의 형상 아래로 조명을 받고 수북히 쌓여있는 비닐쓰레기를 버릴 수도 있는데 놔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작품 1> Leaf. life 1)
"침대 위의 사람 형상과 침대 밑의 조각은 한 작품입니다. 제가 칼질을 하기 전까지 잎맥과 조각은 한 장의 비닐이었죠. 비닐 한 장에서 잎맥모양이 나오고 조각도 나옵니다.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다르게 설치되었지만 이미 하나입니다. 'Leaf . Life 1' 작품은 잎맥으로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 잎맥은 사람의 혈관과도 같아 보입니다. 침대 밑의 비닐 조각들은 사람의 일부가 밑으로 떨어져 내린 모양입니다.

침대 위의 사람은 흔적만 남아있는 죽음, 혹은 몸의 일부분이 사라져 버린 사람을 의미하고 침대 밑의 조각은 죽음 이후의 이미지와 다시 생성된다는 의미와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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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2> Leaf.life 2 ⓒ 유진영


- 침대를 떠나 <작품 2(Leaf.life 2)>로 가는 길은 맨몸으로 가야만 할 듯합니다. 마치 그림자만이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인데요. 여기서 작가의 손이 얼마나 많이 갔을까 하는 생각이 소스라치게 들기도 하던데요. 그 문과 그 문에 새겨진 잎맥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잎맥 모양의 통로 속에 들어간 사람은 잎맥 안에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을 잎맥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즉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삶을 보여주면서,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작품입니다."

- 그 문을 통과하고 빈방으로 들어가면 허전함보다는 가슴 속이 후련해짐을 느낍니다. 더군다나 벽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사람형상이 담긴 잎들을 보면서 사람과 자연으로 구분되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작가의 의도를 묻고 싶습니다.
"실제 마른 나뭇잎을 투각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나뭇잎 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찾고, 사람의 형상을 찾고 나면, 다시금 나뭇잎을 보게 되지요. 이 작품 역시, 자연 안의 사람 그리고 사람 주변의 자연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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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에서 사람을 만나다 ⓒ 유진영


-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듣고픈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첫 개인전이라 그런지, 말이 없어도 제 작품을 열심히 보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에 관한 말라면 어떤 얘기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 다음 전시회는 언제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지 혹시 계획 중에 있지는 않는지요.
"인사동은 미술의 거리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작품으로 장소만 옮겨 다시 한번 전시를 할 예정입니다.

두번째 개인전에는 비닐을 여러 겹 겹쳐서 입체를 만드는 작업과 비닐에 열을 가하여 입체를 만드는 작품을 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돈을 모아야겠지요? 두 번째 개인전은 첫 번째 개인전보다 더 멋진 작품을 할겁니다. 기대해 주세요!"

- 추상물에 대한 감상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 그러려니 하면 되겠지만, 좀 더 알고 보면 작품 이해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좋은 작품이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작가들끼리 하는 얘기입니다. 작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몫입니다. 물론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의 자유입니다. 작품 감상에는 틀리거나 맞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으시다면, 작가에게 “이게 무슨 의미예요?”라는 질문보다는 “저는 이 작품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는데 작가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것이 감상의 폭을 넓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손을 오래도록 잡아주고 싶습니다. 행여 그녀가 손을 내밀면 그녀의 손을 잘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감히 그녀가 손을 내밀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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