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있어 좋은 날

비오고 축축한 날엔 팥죽칼국수로 달콤한 오후를 만들어 보세요

등록 2004.07.08 19:32수정 2004.07.0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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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곳에 친한 이웃이 있다. 몇 번의 이사를 했지만 지금껏 끈끈한 정을 이어 오고 있다. 지나다가 들러서 커피도 마시고 점심도 같이 먹기도 한다.

학창시절 친구들은 온데간데없고 이웃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아직도 여자들의 삶이 남자들의 삶에 더 지배받고 있어서일까.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남편의 직장 따라 이리저리 이사도 하게 되면서 늘 내 옆에 있고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것이 이웃이었다.

그래서 더 가깝게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흉허물이 있어도 자존심 상할 것 없고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 아줌마로서 만났기 때문일까.

또 밥하다가도 뛰어 올라가 "우리 집에 고추장이 떨어졌네" 할 수도 있는 편안함이 있어서일까.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고 사는 것이 비슷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살면서 필요한 이웃간의 정이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열고 그 속에 나를 던지고 들어서면 모두 같아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빗물이 흘러내린 희뿌연 베란다 창을 내다보면서 빨래를 걷고 있으려니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 팥죽 칼국수 먹으러 와."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와 같은 학년인 진원이네 엄마였다. 하이톤의 발랄함이 기분 좋게 해 주는 음색을 가졌다. 덩달아 높아지는 나의 목소리에 생기가 묻어나는 느낌이다. 팥죽 칼국수는 또 처음 들어 본 거지만 축축한 날에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싶었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근처 공원에 위치해 있어서 가는 것도 즐겁다. 새소리 바람소리 사람소리가 있는 공원 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비둘기가 걸을 때는 목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걷는데 참새는 콩콩 뛰며 걷기 때문에 비둘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그걸 발견한 건 딸아이지만 신기하고 재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홍두깨가 없어 맥주병으로 밀가루 반죽을 밀고 있는 것을 보니 어렸을적 할머니가 해주신 손칼국수가 생각났다. 길다란 홍두깨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양손으로 쓱쓱 쓸어 모으다가 옆으로 미끄러지듯 밀면 피자피처럼 넓고 얇게 만들어진다.

그걸 몇 번 접어서 칼로 썰어 두었다가 호박과 싸리버섯까지 넣어서 끓여 주는 칼국수 맛이 일품이라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옛 맛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지금은 팥을 삶아서 체에 곱게 내려 앉힌 다음 칼국수를 끓인 팥물에 한소끔 더 끓여 내면 되는 것으로 김치와 함께 먹으니 별미였다.

전라도 음식 중에 하나라 했다. 손맛이 있어 뭐를 해도 맛이 있었다. 언젠가 김치비빔국수를 해 주어서 먹었는데 달콤매콤 하면서도 시지 않고 맛났다. 여름에 먹는 김장 김치 또한 색다른 맛이라 한포기 얻어가서 똑같이 해 보았지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커피까지 한잔하고 나니 습기찬 기운이 싹 가셔 버렸다. 이래서 이웃이 있어 좋은 것이다. 요즈음엔 아이들이 학교에서 급식까지 하고 오니 혼자서 덩그마니 먹는다는 것도 재미 없다.

그런 날엔 모여서 감자도 삶아 먹고 국수도 해먹고 하다보면 잔잔한 즐거움이 피부 속 깊숙히 스며들어 삶이 조금은 윤택해질 것이다.

농부가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행복도 스스로 가꾸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아침이면 모두 빠져 나간 빈 공간이 주는 허전함을 사랑할줄 알게 해주는 것도 이런 이웃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팥죽칼국수 한 그릇으로 이렇게 달콤한 오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에게 감사해야겠다. 내가 먹어 본 칼국수 중 최고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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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보고 느낀점을 수필형식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제이름으로 어느곳이든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마땅한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여기서 여러기자님의 글을 읽어보고 용기를 얻어 한번 지원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김해등님의 글이 자극이 되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런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실력은 없습니다. 감히 욕심을 내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한구석엔 이런 분들과 함께 할수 있을만큼 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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