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고 도시락 먹는 '백범 집무실'
"민족이 이 지경이라는 게 부끄럽다"

[현장] 임정순례단, 옛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현장서 '분통'

등록 2004.08.16 18:10수정 2004.08.1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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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순례단이 1만3천리의 대장정 해단식을 갖기 위해 백범 집무실을 찾았으나 삼성병원 측이 의사들의 휴게실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이에 순례단이 병원 복도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
임정순례단이 1만3천리의 대장정 해단식을 갖기 위해 백범 집무실을 찾았으나 삼성병원 측이 의사들의 휴게실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이에 순례단이 병원 복도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오마이뉴스 조호진
김인수 대표는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이라는 책이 놓인 자리로 안두희의 흉탄이 뚫고 지나갔다고 설명했다.
김인수 대표는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이라는 책이 놓인 자리로 안두희의 흉탄이 뚫고 지나갔다고 설명했다.오마이뉴스 조호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최초 남북협상의 산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 당한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京橋莊)'은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강북삼성병원의 사유화로 인해 독립운동 후손조차 접근이 차단돼 왔다.

이 병원은 문화재로 지정된 경교장을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병원 측은 백범의 집무실을 보존하기는커녕 바둑을 두거나 잠을 자는 등 야간 당직의사 휴게실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광복절을 맞아 경교장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격분하게 했다.

지난 4일 중국 상하이(上海) 마당(馬當)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 앞에서 출정식을 갖고 임정이 일제의 추격을 피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광저우(廣州) 및 충칭(重慶) 등의 도시를 11박 12일 동안 순례하고 광복절에 맞춰 귀국한 '임정대장정순례단(단장 이윤구 대한적십자사총재)'은 해단식을 갖기 위해 경교장을 찾았다가 병원 측의 어이없는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15일 오후 4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구 고려병원) 본관 2층 백범 집무실을 찾은 임정대장정순례단원 48명이 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병원 측은 의사들의 휴게실이라며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순례단원들은 1시간 동안 백범 집무실 앞 복도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임정대장정순례에 참가한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은 "친일세력들이 역사청산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상징적인 현실"이라며 "백범 선생이 암살 당한 현장이자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무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선생의 혼이 서려 있는 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다"며 병원 측의 태도를 성토했다.

재야 사학자인 이이화(전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씨는 "임시정부 유적과 독립투쟁의 1만3천리를 순례하고 귀국해 백범 선생 집무실에서 해단식을 갖기 위해 왔다"며 "민족의 지도자였던 백범 선생과 독립운동의 한(恨)이 서린 경교장이 재벌병원의 소유물이 돼 독립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통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바둑두고 도시락 먹는 백범 집무실..."민족이 이 지경이라는 게 부끄럽다"


1시간 여 농성 끝에 백범 집무실에 들어간 순례단원들은 탄식을 토했다. 한 참가자는 "백범 선생의 집무실이 바둑을 두고 도시락을 먹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너무 한심하다"며 혀를 찼다.
1시간 여 농성 끝에 백범 집무실에 들어간 순례단원들은 탄식을 토했다. 한 참가자는 "백범 선생의 집무실이 바둑을 두고 도시락을 먹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너무 한심하다"며 혀를 찼다.오마이뉴스 조호진
의사들의 휴게실로 전락한 백범 집무실에는 1948년 4월 19일 경교장 발코니에서 군중들에게 통일정부 수립의 절박성을 역설하는 백범의 사진 판넬 등과 백범의 친필 액자 <독립정신>과 <행복> <백범전집> 등 관련 서적과 비디오 테이프가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그리고 백범이 흉탄에 쓰러진 자리에는 의사들이 사용하는 침대가 놓여져 있고, 그 옆에는 쓰레기통과 전자레인지를 비롯해 도시락이 담긴 박스가 방치돼 냄새를 풍겼다.


1시간에 걸친 농성 끝에 집무실로 들어가 이를 목격한 임정대장정 순례단원들은 탄식을 터뜨렸다. 일부 참가자들은 역사의 무지에 내몰린 백범 선생을 생각하며 흐느끼기도 했다. 한 참가자는 "백범 선생의 집무실이 바둑을 두고 도시락을 먹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너무 한심하다"며 혀를 찼다.

이윤구 대한적십자사총재는 임정대장정에 대한 회상과 백범을 추념하는 편지를 낭독한 뒤 자신이 만든 '광복의 노래'를 부르며 흐느꼈다. 이 총재는 "처절한 조국의 현실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며 "선생께서 이런 모습을 보면…. 민족이 이 지경이라는 게 부끄럽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인수 실무단장(54·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은 "('아! 경고장 비운의 역사현장' 표지를 가리키며) 백범 선생이 흉탄을 맞고 돌아가신 뒤 통곡하는 저 시민들을 봐라"며 "(침대를 가리키며) 선생께서 흉탄에 쓰러진 역사의 현장에서 침대를 놓고 잠을 잘 수 있는가"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최충묵(76·항일의병장 최구현 선생 종손)씨는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해놓고도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 정권은 백범 선생의 정신을 말살시키기에 급급했다"며 "독립군을 토벌하던 박정희 기념관에는 200억씩 지원하면서도 대표적 독립운동가의 유적을 방치하는 이 나라 정부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삼성병원 "11월쯤 백범기념실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개할 계획"

경교장과 삼성병원... 삼성병원 측은 오는 11월쯤 백범기념실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경교장과 삼성병원... 삼성병원 측은 오는 11월쯤 백범기념실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오마이뉴스 조호진
서울시 문화재 관계자는 16일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공식적으로 가치를 인정한 것이지 사유재산을 침해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며 "백범 선생 집무실 공개를 권유할 수는 있지만 행정명령으로 강요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삼성병원 측에 백범 선생 전시실을 만들도록 권유하고 있으며 병원 측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내년쯤이면 24평 규모의 전시실이 시민들에게 개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북삼성병원 관계자는 "(임정대장정순례단의 방문) 연락을 받지 못했다. (백범 집무실을) 야간 당직의사들의 휴게소로 이용하고 있으며 환자 편의를 위해 집무실 공개를 제한하고 있다"며 "오는 10월말 본관 증·개축이 끝나면 여유 공간이 생겨 오는 11월쯤 백범기념실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반면 김인수 실무단장은 "지난달 26일 대장정 출발을 앞두고 경교장에 헌화하면서 해단식을 경교장에서 하겠다고 병원측에 통보했다"며 "집무실을 엉망으로 사용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경교장은? … 반탁 포고령 발표, 남북협상 결행 장소, 그리고 '백범일지'…

경교장 안에 차려진 김구 선생 빈소. 온 국민이 항일투사이자 민족지도자인 백범의 죽음을 애도했다.
경교장 안에 차려진 김구 선생 빈소. 온 국민이 항일투사이자 민족지도자인 백범의 죽음을 애도했다.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일제하 광산재벌 최창학은 건평 265평 규모의 일본식 2층 석조건물인 경교장을 환국한 백범에게 무상 임대했다. 백범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공사 죽첨(竹添)의 성을 따 지은 '죽첨장'을 '경교장'으로 바꾸었다.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부터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1949년 6월 26일까지 경교장을 집무실 겸 거처로 사용했다. 백범은 이곳에서 임정국무회의를 열어 반탁 포고령을 발표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결행하고 또 자전적 일기인 '백범일지'를 썼다.

백범이 서거한 뒤 최창학에게 돌려진 경교장은 중국대사관저로 사용되었다가 6·25 당시에는 미군 특수부대가 주둔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월남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1966년 삼성재단에 넘어갔다. 삼성은 1968년 개축할 당시 철거할 예정이었으나 고 이병철 회장의 뜻에 따라 철거하지 않고 내부 수리만 했다.

삼성병원은 지난 1996년 2월 17층 규모의 병원을 신축하기 위해 경교장을 철거할 계획이었으나 여론의 반발로 무산됐다.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은 지난 96년부터 경교장 복원 및 국가문화재 지정을 위해 서명운동 등을 꾸준히 벌였지만 국가문화지정은 무산됐다. 서울시는 지난 2001년 4월 6일 삼성생명(주) 소유로 된 경교장을 유형문화재(제129호)로 지정했다.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김인수 대표는 "경교장 복원 및 국가문화재 지정을 위해 8년간 노력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서울시가 문화재로 지정했지만 삼성은 공개를 차단했다"며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하면서 환자들도 시민들도 모르도록 경교장을 방치한 정부에게 과연 정통성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또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경교장 복원을 반대할 국민은 없다. 다만 친일파 세력들은 백범 선생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 정신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며 "삼성병원에 대체부지를 마련해주고 경교장을 성역화 할 것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고 정부를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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