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병아리도 친구가 필요한 가 봐요"

등록 2004.09.06 16:20수정 2004.09.06 18:1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들어오기만 해봐라. 다시는 수영장을 보내지 않을테니까.”

해가 져 가는데도 돌아다니는 딸아이의 행동에 화가 났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놀 시간이 없는 요즘 아이들이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를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수영을 하러 다니게 했다. 처음에는 같은 반 친구 한 명과 다녔지만 지금은 5~6명쯤이 모여서 다닌다.

처음에는 심심해서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대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혼자서 지내는 법도 터득해야 돼’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렇게 심심해 하는 딸아이에게 ‘이럴 때 책을 읽으면 좋잖아’ 라고 말했지만 딸은 그때마다 말했다.

“재미없어. 빌려온 책도 다 읽었어. 맨 날 책만 읽어래. 난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딸은 수영을 다니면서 무척 즐거워했다. 일주일을 기다리며 자잘한 계획도 세우곤 했다. 가령 수영하고 돌아올 때 출출하니까 용돈이 필요하다며, 아빠의 귀에 있는 귀지를 깨끗이 판다거나 신발정리 또는 심부름 등등을 해서 용돈을 모으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의 용돈을 오빠에게, 엄마인 나에게 빌려 주곤 비싼 이자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도 밉지가 않았다. 그런 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이 자꾸만 늦어져서 나의 애를 태우게 했다. 부엌 창에 어둠이 깔렸다. 놀이터도, 뒷동 아파트에도 하나 둘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화를 삭이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내 동생이야. 이쁘지?”

딸아이는 가슴에서 여리고 작은 병아리 한 마리를 내려놓았다. 순간 머리끝까지 타오르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샀어?”
“아니, 문방구 할머니가 키우라고 주셨어.”
“잘 키울 수 있어? 밤새도록 ‘삐약’거리며 울어댈텐데….”
“잘 키울 수 있어. 이것 봐. 밥도 잘 먹잖아. 물도 마시고….”
“그래 알았다. 손 씻고 와. 우리도 저녁 먹어야지.”

그런데 병아리는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조그만 입에서 그런 큰소리를 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혼자 갇혀 있는 것이 불안했던 것 같았다. 온 신경이 병아리에 쏠려 있는 딸아이는 한 숟가락도 밥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놀아 주니 울지 않는다며 꼼짝없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조그만 인형을 가져와 병아리의 눈앞에서 흔들어 대면 병아리는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콕 쪼아 보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형이 넘어지자 병아리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아리를 넣은 상자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지, 병아리는 상자를 폴짝 뛰어넘어서 온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인을 아는지 꼭 딸아이의 발등에만 가서 비빈다. 이런 재미로 사람들이 애완견을 키우며 사랑과 정성을 쏟고 행복을 느끼겠구나 싶었다. 우리 가족은 혹시나 밟힐까봐 조심조심 걸어 다녀야만 했고, 의자도 조심조심 빼야했다.

아빠는 다시 돌려주라고 성화였다. 여기저기 똥을 싸고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앞으로 이렇게 매일 풀어 놓고 키울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병아리를 베란다에 내어 놓았다.

안과 밖을 아는지, 자꾸만 들어오려고 유리문을 쪼아댔다. 안에서는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니더니 베란다에서는 목청이 터지도록 ‘삐약’거렸다. 유리문에 푸드덕 날아오르다가 부딪혀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며 울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딸아이는 “엄마! 아무래도 쟤도 친구가 필요한가봐, 친구에게 데려다 줄래”라고 말했다. 나는 딸아이에게 “그러자, 아쉽고 서운하지만 그게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딸과 나는 그날 밤, 문방구 할머니네로 갔다. 라면 상자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엉켜서 잠을 자고 있기도 했고, 여기저기 콕콕 쪼아대며 부지런을 떨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한 마리도 울지 않았다.

딸아이는 병아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루 동안 몇 번이나 환경이 변해버려서 정신이 없는지 병아리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친구들에게 눈인사라도 하는 것인지 목을 흔들었다. 울지도 않고 서로의 털을 부비며 파고들 듯이 잠을 청하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왔다. 할머니는 아마도 추워서 그렇게 울었을 거라고 했다.

“엄마! 쟤가 외롭고 무서웠나 봐. 돌려주기를 잘했지?”
“그래, 동물도 사람도 친구가 필요한거야.”
“근데 자꾸 ‘삐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애. 허전하기도 하고….”
“오가며 볼 수도 있잖아. 내일 가서 잘 있나 보고 와.”

병아리가 다녀간 잠깐이었지만 내 가슴이 아렸다. 정이란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할머니는 병아리를 키우면서 싹트는 마음이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좋을 듯해서 한 마리씩 나눠 주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언제나 고운 마음으로 내가 먼저 하다보면, 아랫사람이든 윗사람이든 다 따라 하게 되어 있다”며 “애기 엄마도 늘 내가 먼저 이해하는 마음으로 서 있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씀하셨다.

목욕탕에서 만나도 먼저 때수건을 들고 와서 밀어주시는 할머니였다. 내가 먼저 밀어드리겠다고 해도 “애기엄마보단 내가 힘이 더 좋아, 이 몸으로 어떻게 때를 밀어 걱정마” 하시며 등에다 철썩 물 한바가지를 붓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 눈과 아이들의 마음은 온통 세상이 아름다운 모습만 가득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잠자는 딸아이의 주변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아름다운 눈이 싹트기도 전에 싹둑 잘라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안타까웠다.

공기오염보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서울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보기 힘들다고 했는데…. 아이들의 시야를 가리는 도시의 불빛이 오히려 내가 아닌가하며 자문해 보았다.

아무튼 그 조그만 것이 우리 가족에게 준 것은 엄청났다. 정과 사랑, 허전함, 환청(삐약거리며 우는 소리), 친구, 세상이 주는 아름다운 모습 그런 것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가면서 보고 느낀점을 수필형식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제이름으로 어느곳이든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마땅한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여기서 여러기자님의 글을 읽어보고 용기를 얻어 한번 지원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김해등님의 글이 자극이 되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런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실력은 없습니다. 감히 욕심을 내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한구석엔 이런 분들과 함께 할수 있을만큼 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