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 가슴엔 바람이 일고 있다

하늘공원 억새꽃 축제를 다녀와서

등록 2004.10.18 22:13수정 2004.10.1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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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가슴 속에 바람 한 점을 달고 살았다. 밥을 먹을 때도, 지하철을 탈 때도,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도, 켜켜히 가슴 속을 꿰뚫고 지나는 바람을 느꼈다. 전설처럼 맴도는 기억들이 발등에 떨어지는 날엔 햇살 한 줌 목말라 난 늘 버스를 탔다.

파아란 하늘빛 사이로 언듯언듯 내비치는 여름 끝이 가을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책으로도 인터넷으로도 알 수 없는 빛깔들을 그리워하며 도림천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하나에도 난 사랑을 했다. 내 키보다 더 큰 억새풀에서 어느날 뚝뚝 떨어지는 빨간 노을빛 하나가 차고 들어왔다. ‘하늘공원 억새밭’이었다. 출렁이는 도로 위에 난 상상의 날개를 달고 달음박질쳤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부터 잃어버렸던 빛을 찾기 위해 숨가쁘게 하늘공원에 닿았다. 마주한 공익근무요원의 구리빛 얼굴에서도 가을빛이 느껴졌다. 입구에서부터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묵은 솔 향이랄까. 은은한 향기가 머리를 맑게 했다. 늘 머릿속이 뿌옇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 같은 느낌이었는데, 맑게 개인 하늘 같았다면 좀 과장된 표현일까.

높게 이어진 나무 계단은 하늘을 뚫고 지나갈 듯하다. 거기다 청사초롱이 걸려 있었는데, 마치 가마타고 시집가는 새색시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한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 앉은 햇살이 튕겨지듯 하늘로 퍼져 났다. 구름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맑고 고운 물빛하늘에 까만 머리가 닿아 있었다. 그래서 하늘공원이라 하지 않았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하늘을 닮아 있었다. 장애아동들의 도우미로 나온 학생들, 노란 병아리 옷을 입은 유치원아이들 모두의 얼굴에 파아란 물빛이 가득 번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발을 들여 놓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얀 털을 달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억새밭의 그 광활한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성큼 억새밭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줄기사이로 가슴을 휭하니 쓸고 가는 바람소리 한 점 뚝 떨어졌다. 이제야 소리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공기처럼 머물며 떠나지 못했던 통증이 이것이었음을.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에 가슴 한 켠을 털어냈다.

멀리서 바라보는 그것은 수면 위를 튀어 오르는 은빛 물고기 같다가도 거센 파도를 휘몰며 달려드는 성난 바다 같기도 했다. 여린 풀잎으로 땅바닥에 누워 있을 땐, 내 손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난 줄기를 가닥가닥 묶어 우산을 만들어 핑그르르 돌려 날려 보내기도 했었는데, 여기서 보는 억새풀은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녹이며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옆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숨결이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밋밋한 생각들이 유독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것은 억새가 주는 감동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하지만 '서양벌 노랑이꽃'을 보았는데 그 옆에 우리 나라 민들레보다 몇십 배나 큰 서양 민들레를 보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황소개구리가 생각났다. 이러다가 우리 꽃이 점점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 외 큰비자루국화, 미국쑥부쟁이, 왕고들빼기, 때죽나무 등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

아이들에게 식물도감까지 곁들여가며 설명을 해주고 계시는 유치원 선생님이 이런 것은 알고나 있을까 하는 노파심까지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옆으로 슬쩍 지나치며 설명을 듣기도 했다.

여전히 바람은 억새밭을 휘돌며 서걱대고 있었고, 그들 틈에 끼어 목만 빠끔 내 놓고 한껏 포즈를 취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흔한 디카조차도 만질 줄 몰라 챙겨오지 못한 촌스러운 여자가 나임을 어떡하랴.

마른 풀잎 냄새 진동하는 가을논밭이, 문만 열면 불타는 듯한 앞산의 단풍이 미치도록 그리운 것은 잃어버린 마음의 빛깔이었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은빛물결과 끝없이 이어진 길에서 맨발로 걸을 때의 그 부드러운 촉감이 지금 내 눈앞에 일렁이고 있는 억새풀의 은빛물결과도 같음을 피부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다.

정류장처럼 머무는 기억의 샘이 이토록 나를 황홀하게 했을까. 아직도 내 가슴엔 바람이 일고 있다. 억새풀의 아름다운 바람이 한동안 나를 황홀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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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보고 느낀점을 수필형식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제이름으로 어느곳이든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마땅한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여기서 여러기자님의 글을 읽어보고 용기를 얻어 한번 지원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김해등님의 글이 자극이 되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런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실력은 없습니다. 감히 욕심을 내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한구석엔 이런 분들과 함께 할수 있을만큼 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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