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퇴원 영수증을 붙이며

연말정산 서류를 정리하며 아버지를 다시 불러봅니다

등록 2004.12.30 23:15수정 2005.07.1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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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아버지의 가퇴원 영수증 ⓒ 심재철

올해가 가기 전 부랴부랴 연말정산 서류들을 정리해서 제출했습니다. 보험료 영수증, 신용카드 사용 내역서, 기부금 영수증 그리고 병원과 약국 영수증까지 다 모아 날짜별로 가지런히 붙였습니다.

그 중 제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병원비 영수증이 한 장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가퇴원 영수증. 지난 6월 18일 인천의 한 병원에 지불하고 받은 것입니다. 전이성 간암과 싸우시던 아버지는 그 날로부터 딱 열흘만에 우리 가족 곁을 떠나셨습니다. 예순 다섯 해. 너무 빨리 가셨습니다.

어린이 날을 하루 앞두고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이름난 병원을 찾았습니다. 동네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 받은 각종 검사 결과표를 가지고 가면서 최악의 상황만 닥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면서 말입니다. CT 촬영 결과가 나오자 주치의께서는 보호자를 찾았습니다. 물론 환자인 아버지께서도 함께 설명을 들으셨습니다.

선명한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주치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냥 많이 나쁜 상태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때 그 말씀이 더이상 손 쓰기 힘들 정도로 암세포가 퍼져 있다는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아니 믿기 싫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주치의는 다른 곳에서 전이된 것이라는데 그 원인을 찾아야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뭔가 손을 쓰자는 말에 작은 희망을 걸었습니다.

낯선 병실에 아버지만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냥 하룻밤 자고 나면 그 때 들었던 말이 감쪽같이 거짓말로 변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퇴근 후 병원에 가서 다른 의사를 통해 들은 설명은 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단순한 간암이 아니라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와 이렇게 되었고 치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몇 년 아니, 몇 개월이라도 더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어 정신을 차렸습니다.

가족 회의 끝에 일산에 있는 암센터에 의뢰를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CD에 검사 자료들을 복사해서 찾아가 봤지만 역시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대신 아버지를 모시고 갔던 아내가 더 씁쓸한 말만 전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일단 검진 결과를 받아들여 원래 병원으로 돌아왔고 아버지께서는 병원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난 6월 18일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로부터 열흘째 되는 날 아침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하시기로 마음을 굳히신 것 같았습니다. 약간의 혼수 상태와 치매 증상을 번갈아 보이시며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도 시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입원하시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약 두 달 반 사이에 저는 거의 아버지 곁에서 지냈습니다. 마흔이 다 되도록 아버지와 그렇게 가까이 지냈던 적은 처음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하기만 한 이 아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께서는 장례식장까지 정해놓으셨습니다. 친척들이 아무리 우겨도 화장을 해서 선산으로 가지고 가 조용히 뿌려달라는 말씀까지.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6월 말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셨습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지만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에 빠지는 것 아니라며 누워서 손짓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두 시간만에 돌아와 잡은 아버지의 손은 너무나 차가웠습니다. 마지막 절을 올리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부평장묘관리사업소 7번 화로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아버지!"라는 외마디 소리를 얼마나 크게 질렀는지 모릅니다. 살아계실 때 더 많이 부르지 못했던 한을 그제서야 느꼈습니다.

약 13년 전, 저는 결혼과 동시에 부모님 곁을 떠났습니다. 아무리 큰며느리지만 시집살이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딴 살림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5년 전 초겨울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침착하고 빠르게 대처해 주셔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머니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아버지는 거의 모든 시간을 어머니 간호에 보내셨습니다. 이 못난 아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자식들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떠맡으시다보니 저렇게 당신의 몸이 망가지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저 나 하나 살기 바쁜 세상이라며 늘 가까이에 있어드리지도 못한 것이 어리석게도 이제와 후회로 남을 뿐입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조차도 아무 소용없음이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할 줄 몰랐습니다. 올해가 끝나기전에 한 번이라도 더 불러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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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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