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경이의 생활계획표를 공개합니다

등록 2005.01.01 09:47수정 2005.01.0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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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방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생활계획표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생활계획표를 만드는 방식은 너나없이 비슷했습니다. 도화지 한 장에 둥근 원을 그리고,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눕니다. 일어나는 시간과 잠 자는 시간을 먼저 정하고, 그 다음에 식사시간을 채워 넣습니다.

오전에는 아침운동이, 저녁에는 TV 시청이 반드시 들어갔던 것도 당시 초등학생 생활계획표의 특징이었습니다. 생활계획표에 태권도 학원이나 피아노 연습 따위를 적어 넣는 아이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독서시간을 많이 표시했습니다.

채울 만한 게 없으면 자유시간이라고 표시합니다. 자유시간이 너무 길면 생활계획표를 무성의하게 만들었다고 혼 나기도 했습니다. 그 또래의 열에 아홉은 잠자는 시간을‘꿈나라’라고 표시했던 것 같습니다.

새해에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예경이가 어제 겨울 방학을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일 먼저 한 숙제가 바로 생활계획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내 준 종이에는 이미 원이 그려 있었고, 한 귀퉁이에는 부모님 확인란까지 있었습니다. 아이들 나름대로 독창적인 모습으로 만들도록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경이는 몇 번을 지웠다 쓰고 다시 지우느라 종이가 찢어져 테이프까지 붙여가며 열심히 생활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저더러 확인란에 서명을 해 달라며 당당하게 내밀었습니다. 그 생활계획표를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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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경이의 겨울방학 생활계획표입니다 ⓒ 이봉렬

휴식시간으로 시작해서, 자유시간을 지나고, 놀기로 이어지는 오후 일정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노는 시간입니다. 도서관 가는 시간도 따로 정해 놓았지만 도서관이 놀이터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놀러 가는 시간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냥 오후 내내 자유시간이라고 하지 그랬냐고 물었더니, 노는 시간은 친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고, 휴식 시간은 혼자서 편하게 지내는 시간이라서 다르다고 대답합니다.

저녁 식사 이후 자유독서 시간이 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닙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자유독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을 수도 있다는 의미의 자유독서랍니다.

그래도 제가 어릴 때 열심히 만들어 놓고 단 하루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생활계획표보다는 훨씬 현실성 있는 계획표입니다. 그래서 군말 않고 서명했습니다. 이제 저에게 숙제가 생겼습니다. 생활 계획표 대로 하루 종일 놀기만 해야 하는 예경이의 방학생활을 위해서는 제가 함께 놀아줄 거리를 찾아야 할 테니까요.

요즘 아이들은 방학이 되어도 공부다, 특기 적성 수업이다 해서 제 또래 친구들과 제대로 뛰어 놀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욕심을 조금 버리면 아이들이 조금 더 밝고 건강해 질 수 있을 겁니다.

2005년 새해에는 골목 골목에서 우리 아이들의 밝고 건강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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