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가 석달 만에 집에 왔습니다

등록 2005.01.20 17:03수정 2005.01.2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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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집으로 데려오는 길이 막혀 석달 만에 외박을 하는 준수의 귀중한 시간을 길에서 허비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광수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엄마와 형과 함께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아내와 준수는 벌써 짐을 싸서 외박할 준비를 끝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박할 때 먹을 약 처방이 늦어져서 한시간 정도 기다렸습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습니다. 석달 넘게 기다린 사람들이 한시간도 못 참아 안달이냐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시간의 길이가 얼마든지 다른 느낌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기 지루한 건 준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팔 힘을 이용해서 엉덩이를 올렸다 내렸다를 되풀이했습니다. 엉덩이 근육이 제대로 붙지 않아 맨 바닥에 앉으면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엉덩이 근육을 되살리려면 끊임 없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준수는 기다리는 시간에도 운동을 합니다. 운동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댑니다.

환자복이 아닌 일반 옷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준수는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멀쩡한 사람도 환자복을 입혀 놓으면 환자처럼 보이듯이 일반 옷을 입은 준수는 더 이상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옷차림이 주는 느낌의 차이가 참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휠체어에서 운동을 하던 준수가 침대에 있는 신문을 보려고 일어섰습니다. 양다리를 가지런히 바닥에 붙이고 휠체어에 의지해서 일어서서는 재빨리 침대로 몸을 틀어 침대 가장자리를 잡고 팔의 힘에 의존해서 침대에 걸터앉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모습은 환자복을 입고 있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옷차림이 주는 느낌의 차이가 아무리 크다 해도 본래 모습까지 바뀔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준수, 집에 가서 좋겠네."
"집에 가서 휠체어 두고 걸어서 와라."
"감기 뚝 떼뿔고 와야 혀."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외박 나가는 준수에게 따뜻한 말을 해 줍니다. 병실 환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려 많은 분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석달 넘게 입원한 준수는 병실 입원 기간으로 따지면 가장 고참입니다. 그러다 보니 병실뿐만 아니라 재활 병동에서 생활하는 많은 분들이 준수를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 역시 외박하는 준수의 어깨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아빠 닮아 숫기가 없는 준수 녀석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습니다. 병실에 오래 있다 보니 녀석이 더욱 소극적이 되고 자신감이 없어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기다리던 약 처방이 끝나고 조제된 약을 받고서야 병원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병실 밖에선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왔습니다. 광수와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준수는 칼바람 추위에 주눅들지 않고 기다리던 차에 탔습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단풍이 곱게 들기 시작할 무렵 입원한 녀석이 칼바람 추위가 매서운 겨울에 처음으로 병원 건물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정식 퇴원이 아니라 1박2일의 외박을 하는 것입니다.

"준수야, 병원을 나서 보니 기분이 어때?"
"좋아요."

아직은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지 녀석의 답변은 간단하기만 합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던 준수는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설 무렵에 잠이 들었습니다.

일찍 서두른 덕분에 아직은 차가 많이 밀리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집에 도착해서 오순도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석달만에 맞이한 준수의 귀가가 비로소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석달의 풍경이 달리는 차의 속도에 맞추어 뒤쪽으로 뒤쪽으로 빠르게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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