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죄인이었오

임지현의 <적대적 공범자들>을 읽고

등록 2005.02.22 03:47수정 2005.02.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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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임지현, 민족주의와 완전히 결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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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들 표지 ⓒ 소나무

서평을 쓰기 위해 임지현 교수에 대한 언론 자료를 찾는 와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필자의 게으름이거나 지적인 무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그가 민족주의자였던 사실이다.

‘9·11 이후의 민족주의’라는 장의 서두에서도 언급됐듯이 임 교수는 1999년에 발간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시민 민족주의를 제창했었다. “단일 혈통과 공통의 조상, 민족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혈통·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게 임 교수의 항변이었다.

필자가 흥미롭게 느꼈던 건 <적대적 공범관계>를 다룬 기사 중에 그가 민족주의와 완전히 결별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일간지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1등 신문’ 조선일보조차도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워낙 임 교수가 일상적 파시즘이나 ‘닫힌’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판의 날을 세웠기에 임 교수와 민족주의는 물과 기름의 관계로만 인식된 게 일반 독자들의 시각이었다.

그런 임 교수였기에 그 자신이 제창한 시민 민족주의도 한시적인 용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다만 그 유통기한이 언제인지는 임 교수 자신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민적 민족주의의 용도 폐기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바로 9·11테러다. 9·11테러가 임 교수에게 전환점을 준 것이다. 테러 이후 미국 전역에 불어 닥친 애국주의는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된 민족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아랍계 시민들에 대한 감시와 검열, 테러는 물론, 기병대의 인디언 학살 장면을 그린 서부극이 TV에서 재상영됐다. 즉, 인디언과 흑인,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 유대인 등을 이등 국민으로 차별하면서 포섭해온 ‘국민 만들기’전통이 부활됐다는 것이다.

그런 9·11 이후의 미국 사회를 보고 임 교수는 “특히 9·11 테러 이후 대내외적으로 분출된 미국 민족주의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기초해 시민 혁명을 추동한 시민 민족주의의 이면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인민들의 자발적 귀속 의지에 기초한 ‘원하면 누구나 미국인이 될 수 있다’라는 시민 민족주의가 배타성과 폐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슬람의 혈통·종족 민족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에 대해 가열 찬 비판을 했던 임 교수가 시민적 민족주의를 제창했었던 건 민족주의가 내포한 힘 때문이었다. 전략적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폐기처분 했다가는 민족주의의 헤게모니를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민족주의의 엄청난 에너지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내 편으로 묶어놓은 후 적절한 개조 과정을 거쳐 닫힌 민족주의의 대항마로 쓰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임 교수는 손을 털어버렸다. 이제 민족주의와 임 교수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놓인 셈이다. 마지막 퇴로까지 막혔다고나 할까나?

임 교수는 기존 인식 체계를 부정하고 커다란 발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중심부의 민족 담론이나 주변부의 민족담론이나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과 식민지가 서로 충돌하면서도 서로 닮아가고, 결국에는 서로가 차이점이 없는 ‘거울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중심과 주변이 각기 다른 정당성을 부르짖지만 밑으로부터의 역사 관점으로 볼 때, 둘 다 마찬가지로 권력 담론이기 때문이다. 권력 담론에 대한 언급은 책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거론되는데,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권력은 모두 다 나쁘다고만 할 수 있는가?”

좋은 권력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억압이 아닌 대다수 국민들에 지지를 받는 민주적인 권력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까? 그 부분에서 임 교수는 자발적 동의에 의한 인민주권론의 위험성에 대해서 역설한다.

그는 조지 모스의 주장을 빌려 자발적 동의에 의거한 인민주권론이 파시즘의 기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민의 자기 숭배를 민족에 대한 숭배로 전환시킴으로써 권력이 힘들이지 않고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인민주권론을 계승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현실적인 판단에서 직접 민주주의와 같은 방식을 대안이라고 제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인민주권론이 자발적 동의의 함정에 빠져 파시즘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막을, 인민주권론 안에서의 끊임없는 자기성찰에 대한 요구가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서만 말해보자.

솔직히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는가? 겨우 십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제도권 교육에서 누가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쳐 줬는가?

어쩌면 박정희 정권에서 이뤄졌던 ‘자발적 동의’는 당시 민중들에게 그것이 자발적 동의였는지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하지 않았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 단단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민중들의 ‘자발성’의 부정적 결과만을 따지고 드는 것 자체가 자발성에 제한을 가하는 기율적인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오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임 교수는 너무나 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임 교수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 기초는 좌파적 입장에서 국민국가의 해체라고 말했다. 그 시각은 식민 과거의 청산에도 투영된다.

식민지배의 아픔은 그 시대를 경험한 직접 당사자들 세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습적으로 전해져 그 후세들이 당사자들보다 더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는 것이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다시는 제국에 의해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도 제국처럼 큰 힘을 겸비해야 한다는 식으로 변질되어, 결국 우리 자신도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임 교수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이미 해방 직후 식민주의에 배태됐다고 말한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를 예로 들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당히 위험한 말이다. 마치 그 시대를 산 그들,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오이다’라는 식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친일파 척결이 친일 청산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의 보통 사람들에게 드리워진 내재화된 제국 일본을 전복시키자며 내던진 임 교수의 그물망은 매우 촘촘하기 때문이다.

그 그물망은 피라미 새끼 한 마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다. 그물망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친일의 정도만 따지는 저울질만 남겨질 뿐이다. 그런 저울질의 과정은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지만 할인쿠폰이나 적립포인트 형식으로 지급될 수 있다.

문제는 소수의 친일파 척결과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오이다’가 서로 양립 가능한 것이냐다. 적어도 서로 배타성을 가지고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주장은 간단하다. 친일 매국노의 단죄는 매우 엄하게 하면서 우리 안의 성찰도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법적 단죄를 단호히 하면서 사회적 기억도 공고히 하자는 말이다.

적대적 공범자들

<적대적 공범자들>은 제목부터가 매우 강렬하기에 기자들도 이 지점부터 풀어서 기사를 작성했다. 적대적 공범관계? 학계에서도 아직 승인되지 않은 임 교수의 주장일진대, 탈근대적인 매우 거대한 담론을 일반 독자들한테 설득시킨다는 건 오히려 역설이라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매우 선정적인 제목을 단 평론집이 아닌가? 임 교수의 필력은 매우 뛰어나다. 코페니스쿠스적 인식전환을 요구하는 엄청난 지적인 작업을 독서 대중과 교류할 수 있도록 ‘낮은 곳으로’ 내려와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와 같은 일자무식자도 임 교수의 글에 토를 달고 있지 않은가?

적대적 공범자로 거론된 빈라덴과 부시의 예에서 보듯 그들은 서로를 적대시 하고, 자신에게 날아온 상대방의 적대적 공격을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에 이용하는 교묘한 술수를 쓰고 있다. 그러나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대통령과 떠돌이 테러리스트가 동등 반열로 묶일 수 있을까?

임 교수도 그들 사이에 비대칭성은 존재한다고 시인한다.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비대칭성이 저항적 민족주의를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면서 적대적 공범자들의 고리를 끊는 것이야 말로 해결점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비대칭성이 적대적 공범관계의 결과론을 제시하면 와해될 수 있는 허약한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일까? 무용론을 제기하기보다 비대칭성의 구도를 곱씹어보는 역사적 사유가 먼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적대적 공범관계는 단선적인 연결이 아닌 매우 다면적인 방식으로 서로가 엉켜있을 수 있다. 미국부터가 그렇다. 빈 라덴 말고도 부시는 카스트로, 하타미, 김정일 등과 여러 적대적 공범관계를 이루고 있다. 동북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한국의 민족주의들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루지만 일본, 대만의 민족주의자들과도 서로서로 얽혀 있다. 또한 파키스탄이나, 인도, 베트남의 민족주의들과도 얽혀 있다.

적대적 공범관계의 강조는 현실적 힘의 차이를 간과시킬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다. 강대국의 엄청난 화력 앞에 느긋하게 적대적 공범자의 고리를 깨자고 하는 것은 이상론에 가까운 주장으로 들린다. 이것은 빈 라덴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부시에게 주어진 권한과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파워에 근거한 비판을 빈 라덴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고 적대적 공범자 관계는 지속성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적대적 공범관계>를 읽는 내내 임 교수의 필력과 날카로운 분석에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많았다. 또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땀과 노력을 얼핏얼핏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책을 덮을 때까지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도대체 ‘거울 효과’를 어떻게 깰 수 있는지 해답이 없었다. 각국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힘을 모아서? 그런 교과서적인 답 말고. 진짜 거울 효과를 깰 수 있는 해답 말이다. 그냥 내 앞에 거울을 들입다 내던져야 하나?

책장을 덮으며

임 교수의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국민국가의 해체가 학문적 기초라고 할 만큼 임 교수는 큰 작업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입지를 떠나 봉건, 근대, 탈근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곱씹어 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큰 작업을 하는 나머지 상대적으로 ‘작은’ 일에 대해서는 애정의 찬 시선을 주지 않는다. 또 너무 잘 하려는 의지가 앞서서 성급함마저 내비친다.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간단한 예를 드는 게 나을 듯싶다.

돈도 없고 잠자리도 없는 실업자가 3일간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현기증이 나서 걸음을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이 때 저 앞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 한 사람이 인자한 얼굴을 하고 그 실업자에게 다가온다. 저 사람이 내 허기를 채워주려나?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실업자의 손을 힘껏 움켜잡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런 말을 한다.

“이 썩어 빠진 세상! 일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분배도 없고 성장만 아는 이 미친 세상을 선생님과 내가 손을 맞잡고 변혁시킵시다. 혁명을 합시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나라면 마지막 남아있는 기운을 다 모아 그 녀석의 아가리를 향해 주먹을 날릴 것이다. 현기증 날 정도로 배고픈 사람에게 분배니, 변혁이니 하는 말들보다는 무료급식소가 더 정확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청년의 피 끊는 혈기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부의 구조적인 모순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혁명적인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오히려 무료급식소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작은’ 처방들은 구조적인 모순을 풀어나가기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고 있는 기부문화도 부자들의 대외용 이미지 만들기에 좋은 창구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임 교수와 서로 충돌한다. 임 교수는 큰 이야기를 주장하는 만큼 최선을 추구하려고 한다. 기왕 큰 작업을 하는데 최선의 모델이 적용된다면 두 말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임 교수가 최선을 추구하는 나머지 차선이나 차악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본질에 접근이 아닌 그 본질에서 벗어난 새로운 (대안)본질을 찾고자 하는 임 교수의 학문적 시각이기에 기존 틀거리에 묶여 있는 것들은 아무리 뛰어난 기능적 효과를 가진다 해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장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비판이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런 논리는 자칫 ‘전부 아니면 전무’로 이어질 수 있다. 제 각각의 쟁점들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선을 긋고 구 패러다임을 확정시킨 후 그 안에 내용물들에 대해 일률적인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물이 차선이든 차악이든 상관없다. 최선이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 패러다임의 내용물이기 때문이다.

임 교수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가 탈근대를 지향하기에 현재의 국민국가적 근대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존의 패러다임이라 해도 그것 전부를 다 낡은 자루에 묶어 헐값으로 넘기기에는 판매처도 마땅치 않은데다
‘탈근대가 최선인가?’라는 낡은 자루의 항변이 크게 느껴진다.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소나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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