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며 되새겨 보는 우리 집 가훈

할머니의 유산

등록 2005.12.30 21:38수정 2005.12.3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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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네 집으로 가려고 금호동의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 일이다. 아흔은 됨직한 허리가 굽은 한 할머니께서 무거운 비닐봉지 두 개를 겨우겨우 들고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나는 서둘러 올라가 그 노인의 비닐봉지를 함께 들며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앞니가 두서너 개 빠진 이 백발 할머니는 반갑게 웃어 보이며 "아이구, 고마워요. 새댁! 내가 분수도 모르고 너무 뭘 많이 사가지고"라고 하시고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그 소박한 웃음 속에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는 학력이나 지식은 없는 분이었지만 분수를 지키며 살자는 것을 늘 우리들에게 강조하셨고 그 말씀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 주 동사무소에 호적등본을 떼러 갔다가 내가 만 7세 되던 해 할머니께서 사망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던 금비녀를 교회에 바치라고 유언하셨다고 한다. 당신이 그토록 아끼던 금비녀는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며 힘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라 하셨단다.

할머니의 분수에 넘치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씀대로 아버지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분수에 맞게 살자"를 우리 집 가훈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평생 우리들에게 근검절약 하며 살자고 가르치신다.

우리 형제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조금 여유를 가지며 살아도 될 만한 형편이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화장실 휴지를 눈금 세어 가며 쓰셨고 치약을 짜고 짜고 비틀어 치약이 한 점도 없을 때까지 아껴 쓰셨다.

근검절약은 분수에 맞게 사는 것과 맥이 통한다.

분수에 맞게 산다고 해서 결코 현실에 안주하고 진취적인 희망을, 꿈을 버리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허망한 탐욕을 버리되 자기 환경에서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 해 살자는 것일 것이다.

사실 분수에 맞게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다른 사람 높은 구두 신으면 자기도 그것을 신고 싶고 다른 사람 좋은 집 사면 자기도 좋은 집을 사고 싶고 다른 사람 좋은 차 타면 자기도 좋은 차 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자기분수에 넘치게 빚을 내어 집 사고 차사고 호화생활하다 집안 망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각자의 처지에 맞게,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자기 신분대로 맞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할머니께서 내게 주신 유일한 유산이요, 할머니의 사랑임을 새삼 생각해본다.

이제 2005년의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새해에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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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입니다.세상에는 가슴훈훈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등불같은, 때로는 소금같은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제 바람이랍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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