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는 왜 전당강에 돌을 던졌을까

<중국 문화기행 14> 항주 육화탑(六和塔, 리우허타) 기행

등록 2006.01.10 09:41수정 2006.01.1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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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의 육화탑(六和塔)은 용정 차밭에서 월륜산(月輪山)을 넘으면 자리하고 있다. 용정 차밭에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탔다. 이 기사는 어찌 된 일인지 항주의 상징물 중의 하나인 육화탑 가는 길을 자세히 모른다. 기사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사자산(獅子山)을 내려가 호포천(虎砲泉)을 지나서 육화탑으로 가자고 했다.

시원스럽게 뚫린 호포로를 지나 내려가니 전당강(錢塘江, 쳰탕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당강대교를 만나 차가 우회전하자 산 위에 자리잡은 육화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육화탑이 자리한 산의 언덕 위까지는 수십 개의 돌계단이 이어진다. 이 돌계단에서 보이는 육화탑의 모습이 가장 멋있고, 한눈에 탑의 정경이 들어오기에 이 돌계단 끝에서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육화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돌계단을 올라서면 또 수많은 여행자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고 있는 한 대리석상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성난 얼굴을 하고 입을 악물고 있는 이 소녀는 오른손에 돌을 쥐고 전당강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이 대리석상의 주인공은 13살 난 '육화(六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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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탑 공원의 육화상 ⓒ 노시경

육화의 부모는 전당강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높은 해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전당강을 원망하던 육화는 전당강가의 높은 바위에서 전당강에 돌을 던져 용왕이 사는 궁전의 지붕을 깨뜨렸다고 한다. 용왕은 육화가 전당강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돌을 던지자 그 사연을 들은 후 육화의 부모를 돌려주었다. 용왕이 8월 18일 만조 때를 제외하고는 해일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육화에게 약속하자, 육화도 더 이상 전당강에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한다.

"저 애 표정 한번 야무지게 생겼다. 표정이 정말 웃겨. 돌을 들고 있는 자세도 너무 웃겨 ."
"전설 속의 아이지만 참 귀엽게 생겼네. 저 전설이 이곳에 수많은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거야. 중국은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전국에 산재하지만, 유적마다 있는 전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중국에 끌어들이는 것 같아. 이런 전설 마케팅은 요새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도입하려고 하는 것 같아 다행이야."

전당강은 바다를 향한 하류가 매우 넓은데, 이 육화탑 앞의 전당강은 마치 병목처럼 급작스럽게 좁아져서 바닷물의 역류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전당강은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높은 강으로 세계에서도 이런 강은 흔치 않다고 한다.

특히 음력 8월 18일, 나팔 모양으로 생긴 항주만의 만조 때에는 높이 2∼3m, 시속 25km의 해일이 이 육화탑 앞까지 거슬러 올라온다. 육화탑 앞의 강폭이 항주만 하구의 강폭 대비 1/50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물살은 아주 거세기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이 거센 물살에 사람, 가축, 가옥이 수없이 피해를 당했고, 이 흔치 않은 대역류 현상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과거 중국인들은 이 거대한 바닷물의 역류를 보고 "그 모습은 일만여 마리의 말이 일제히 질주하거나 산악이 연달아 서 있는 것 같으며, 그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이 거대한 역류의 장관은 중국의 옛 시인, 화가들에 의해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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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육화탑 ⓒ 노시경

전당강 북쪽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육화탑도 파도에 희생된 원혼들을 위한 위령탑이자 전단강의 대역류를 방지하고픈 염원이 기린 탑이다. 이 탑의 이름인 '육화(六和)'는 원래 불교의 '육합(六合)'에서 나온 이름으로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는 전단강도 현대의 기술로 많이 정비되어 역류하는 해일의 높이가 과거와 같이 높지는 않다고 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탑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 하늘로 높이 치켜 올라간 13개나 되는 처마가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높이의 탑이다. 탑의 높이가 무려 59.89m나 된다. 다시 재건된 것이긴 하지만, 오월국(吳越國) 전홍숙(錢弘淑) 때인 970년에 지어진 탑이니 그 연륜은 천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나는 가족과 함께 탑의 1층으로 들어가 보았다. 탑의 바깥은 대낮의 태양으로 밝으나 탑의 내부는 아주 조용하고 어두우며 묘하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탑'의 개념과는 다른 곳이다. 이 탑은 탑이자 누각과 같은 기능을 할 정도로 거대하게 지어져 있다. 탑의 한 층만 해도 면적이 한 가옥의 넓이 정도 되니 옛 중국인들의 스케일이 컸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탑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한 아주머니가 서 있다. 아무래도 탑을 올라가는 입장료가 또 있는 모양이다. 대충 웃으며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이 아주머니가 1층 한쪽 구석의 입장권 매표소를 가리킨다. 2층 입구에는 대한민국 한글로 육화탑 입장권을 구매하라는 안내문이 친절하게 붙어있다. 육화탑 공원 입장료를 냈는데, 육화탑에 올라가는 입장료를 또 받는 것은 조금 이해가 안 되고, 그 입장료도 그리 싼 편은 아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모두 가파른 나선형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다. 신영이는 이 신기한 나선 계단을 따라 깡충깡충 올라가고 있고, 아내는 맨 꼭대기까지 계속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부담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내가 질릴 만도 한 게 이 팔각탑은 겉에서 보면 층수가 무려 13층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탑의 내부에 들어와 보면 최고층은 7층으로 되어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의 묘한 소리를 들으며 오르다가, 다리가 아프면 각 층의 중간 방을 빙 돌아가면서 쉬었다. 중국의 중점문물보호단위인 이 탑의 한 층 한 층을 올라섰다.

이 탑은 건립 당시에는 9층탑으로, 내부는 나무로 만들고, 외부는 붉은 벽돌로 만든 탑이었다. 그러나 중국 목조 건축 분야의 걸작이었던 초기의 이 육화탑은 파괴되었고, 현재 건물은 남송 때인 1163년에 재건된 탑의 골격이 남은 것이다. 그 동안 이 탑에 불공을 드리러 온 신자들이 아들 낳기를 기원하면서 육화탑의 벽돌을 하나씩 빼가자 탑이 조금씩 무너졌던 모양이다.

그 후 육화탑은 청나라 때인 1900년에 개축하고, 1991년, 2002년에 재건 수준의 보수를 하였다. 그런데 밖에서 보는 육화탑이 13층의 균형 잡힌 목탑인데 반해, 탑 내부의 일부가 시멘트로 복원되어 있어 목탑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바람이 불면, 이 탑의 각층 처마 끝마다 달려있는 총 104개의 풍경이 은은한 소리를 울린다는데, 지금은 바람이 없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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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탑에서 바라본 전당강 ⓒ 노시경

탑의 가장 높은 층에 오르니, 그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 눈앞에는 중국의 절경인 황산(黃山)에서 발원한 전단강의 거대한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그 위로는 길이 1453m의 전당강대교가 강물 위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다. 전당강대교 1층으로는 기차가 달리고, 2층으로는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이 대교는 일제 침략 당시에 건설된 지 몇 개월 만에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것이다. 육화탑 아래의 전당강은 길이가 410km나 되는 절강성 최대의 하천이다. 이 전당강의 흐르는 모습이 ㄱ역자로 구부러지면서 흐르는 구간이 있어 성의 이름이 '절강성(浙江省)'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가족들과 이 육화탑 정상에서 전당강의 경치를 감상하는 '전강관조(錢江觀照)'를 하였다.

강 위에는 바지선 여러 척이 강물 위에 두둥실 떠 있다. 과거 송나라 당시에는 이 곳에 수많은 정크선이 오고가며 사람과 물자를 날랐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전당강은 현재 안개가 짙게 끼어서 강 반대편이 몽환과 같이 뿌옇게 보인다. 육화탑의 북쪽으로는 울창한 산림이 항주 시내쪽을 향해 한적하게 이어지고 있다.

육화탑을 내려와 중국의 탑과 누각을 보여주는 중화고탑박람원(中華古塔博覽院)을 둘러보고 전당강이 내려다보이는 대나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나와 아내, 신영이는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전당강을 바라보았다. 신영이는 작은 배낭 안에 넣어 온 중국산 장난감을 야외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놓고 놀이를 하고 있다. 탑을 오르느라 약간 긴장됐던 다리 근육이 대나무 의자 위에서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전당강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 저 조용한 강물이 과거에는 사람들을 삼키고 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강물 위 뿌연 안개 속 전당강대교에 차들이 지나다니고 육화탑을 오르는 관광객들의 행렬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육화탑 공원을 내려오는 계단에서도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육화탑의 온전한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다. 중국의 관광지 자체는 그 유구한 역사로 인해 매력적이나, 그 관광지에 몰리는 수많은 인파로 인해 차분한 여행을 하기는 힘든 것 같다.

육화탑을 내려와 육화탑 공원의 커다란 주차장에 들어서니 택시 기사들이 우리 가족에게 접근한다.

"항주 서호 구경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됐거든요. 서호는 이미 봤네요."

또 다른 택시 기사가 접근한다.

"항주에서는 서호 구경이 최고입니다. 함께 관광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가족은 택시가 줄을 서 있는 주차장에서 나와 대로를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탔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5년 8월말의 여행 기록입니다.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기는 2005년 8월말의 여행 기록입니다.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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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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