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문경미
유씨의 신병을 확보한 공안당국은 범죄사실 조사결과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겠다"고 진술한 유씨의 조서를 근거로 구속영장 신청서류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공안당국은 사전에 대책회의를 갖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유씨의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하루 전인 10월 3일 허문도 (당시) 문공부 차관 주관 하에 안기부, 치안본부 등 관계기관이 참가하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대책회의 결과 4일 낮 관악경찰서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는데, 뒤에 서울시경 국장이 발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발표문도 경찰이 작성한 게 아니라 '전문가'라 불리는 문공부 직원 2∼3명이 작성했다."
경찰 발표 당시 김씨는 안 경무관의 지시로 구속영장 청구서류를 갖고 서울 남부지청에서 대기하도록 돼 있었다.
"안 경무관은 나에게 관련 서류를 갖고 남부지청에 가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지시가 내려지면, 곧바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라고 했다."
10월 4일 낮 12시, 서울시경은 서울대학생들에 의한 민간인 폭행사건이 발생했다는 수사결과와 함께 유씨의 구속 사실도 발표했다. 하지만 유씨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시간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공안당국은 법원이 영장을 채 발부하기도 전에 자의적으로 '구속'을 발표한 셈이다.
"당시 남부지청 제1부장검사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부장검사가 지청장의 호출을 받고 불려갔다 오더니 '가져온 서류를 좀 보자'고 했다. 그래서 유씨 구속영장 신청서류를 줬더니 그 자리에서 자신이 결재하고, 지청장 결재까지 맡아 담당검사에게 넘겨주면서 곧바로 영장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 뒤 부장검사는 나에게 크게 화를 냈다. 어떻게 검사가 범죄사실 요지도 읽어보지 못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느냐면서…."
김씨에 따르면 당시 검찰조차 구속영장 청구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던 셈이 된다. 그 뒤 유씨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해 2심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돼 복역했다.
"'물고문'도 있었다... 피해자들 어떤 보상받았나"
김씨는 당시 군사정권이 유씨를 무리하게 '폭력사범'으로 엮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폭력행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당시 학생들이 4명의 피해자에 대해 심한 폭행을 가한 것은 사실이다. 마치 왜정 때 순사들이 하던 것처럼…. 몽둥이로 악랄하게 했다. 심지어 학생들은 피해자들의 손발을 묶고 주전자로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학생들이 그때 매우 흥분한 상태였고, 유씨조차 그런 상황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김씨는 유씨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씨가 '항소이유서'에서 밝혔듯,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은 있지만 폭행을 지시하거나 가담한 사실은 없다. '항소이유서'에서 유씨가 말한 내용이 100% 맞는 말이다. 일부 언론에서 유시민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하거나, 마치 유시민이 '폭력배의 거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모두 헛소리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김씨는 당시 사건이 당연히 '민주화운동'의 일부로 인정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해자들의 명예와 피해 회복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뒤늦게 당시 사실을 밝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씨가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학생들이 '가짜대학생'을 이유없이 때렸겠나. 당시 상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에게 맞은 민간인 4명도 피해자들이다. 대학생들에게 잡혀 심한 폭행을 당했다는 주장도 다 맞다. 그 때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도 되고, 변호사, 교수도 됐지만, 피해자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 지금이라도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서로 용서를 빌고, 화해한 뒤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 | '서울대 프락치사건'이란 | | | | '서울대 프락치사건'은 지난 22년간 유시민(47)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곤혹스럽게 만든 '꼬리표'다.
유 내정자가 17대 총선에 출마에 나섰을 때 본인조차 선거 홍보물에 당시 수의복을 입었던 모습을 싣고 "버리고 싶은 사진 한 장"이라고 밝힐 정도였다. 물론 유 내정자는 당시 사건 자체는 여전히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대학생들은 지난 84년 9월 17일부터 27일 사이 열흘간 '가짜대학생'이었던 임신현(48), 손형구(41), 정용범(47), 전기동(51) 등 4명을 붙잡아 20시간에서 5일씩 감금·폭행했다.
대학생들로부터 '프락치(정보기관의 정보원)' 오해를 받은 이들은 각각 다른 날짜와 경로로 붙잡혔다. 하나의 사건에 묶인 피해자가 아니라, 각각 개별 사건의 피해자라는 뜻이다.
폭행사건을 인지한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고, 10월 4일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던 유시민(당시 경제학과 3년) 의원을 구속했다. 유 의원은 같은 해 8월 정부의 복교조치 이후 한달 만에 수감되면서 다시 제적됐다.
이후 백태웅(당시 공법학과 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교수, 윤호중(철학과 4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이정우(공법학과 4년) 변호사 등 연루자들도 차례로 처벌을 받았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운동권 학생들의 도덕성을 문제삼았다.
한나라당도 7일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피해자 중 한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 유 내정자를 압박하려 했으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한편 전기동씨 등 피해자 4명이 과연 '프락치'였느냐는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손현구씨의 경우, 당시 서울대학생들에게 자신이 프락치였음을 고백해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가짜대학생' 노릇을 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프락치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수사기관도 이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 | |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공유하기
"상부에서 유시민으로 엮으라고 지시 민간인 폭행한 것은 다른 연루자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