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말하는 종이를 아세요?

등록 2006.04.29 09:06수정 2006.04.2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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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하는 종이를 아세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어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바지 주머니에서 부시럭거리며 네모나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접은 부분을 펼치니 오똑한 코와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입이 보이고, 두 눈은 연필로 동그랗게 그려 넣은 사람 얼굴이었다. 뺨 양쪽엔 '앞으로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겠습니다'라고 적어 놓았다.

'담임선생님께 보여드린 것인데 선생님도 한번 보세요'하면서 건네는 아이의 손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것이 말하는 종이로구나! 접었다 펼쳤다 하니 코와 입이 움직이네."
"그래요, 선생님. 그런데 눈이 너무 슬퍼요."
"그래, 왜 슬프지?"
"눈이 울고 있잖아요."
"그러니? 왜 울고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참 슬퍼요."

순간 공기가 축축한 느낌이었다. 비오는 날의 습기 찬 기운이 온 몸을 파고들듯이 저려왔다. 처음 이 아이와 만나던 날 어쩜 이렇게 심술궂은 아이가 다 있을까 생각했다. 폭력적인 행동과 언어는 11살치곤 너무 가혹했고 학습부진보다는 먼저 마음의 정서가 부진한 아이였다.

지금 이 아인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말하는 종이를 통하여 울고 있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신도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몸짓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말하는 종이의 눈은 별나라에 사나 보지. 선생님이 보기엔 별처럼 반짝반짝하는걸."

아이의 마음을 밝게 해주려고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보았지만 한사코 그 아인 말하는 종이는 울고 있다고 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금방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래서 아이를 붙들고 여기서 공부하는 것이 즐겁냐고 물어보았다.

"정말 즐거워요. 공부를 하고 싶긴 한데 하기 싫기도 해요. 그래도 여기 오는 것이 참 좋아요."

다행이다 싶다. 방과후 하는 공부라 하고 싶지 않을 법도 한데 그래도 오고 싶은 곳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게다가 '말하는 종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종이에 이입했다는 건 놀라운 표현력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그 아이의 행동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는 담인 선생님에게 부름을 받았다. 한동안 여기 오지 못했다. 그런 후 나에게도 담임선생님에게도 싸우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가끔 교실 문을 빠끔히 열고 "선생님 저 집에 가요"하고는 사라졌다.

들어오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어제부터 다시 나오기 시작했지만 여전하다. 잠시 그 마음을 숨겨 놓은 모양이다. 눈빛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냥 아이들과 어울려 치고 박고 뛰어다니며 놀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여기보단 운동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아이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를 오고 싶어 하는 건 사람이 그리워서인 것 같다. 그나마 자신을 인정해주고 바라봐 주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던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봄바람처럼 화사하게 이 교실에도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꽃향기가 날아들었으면 좋겠다. 나날이 전쟁을 치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일이 기다려지는 건, 나 또한 전쟁 놀음의 마술에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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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보고 느낀점을 수필형식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제이름으로 어느곳이든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마땅한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여기서 여러기자님의 글을 읽어보고 용기를 얻어 한번 지원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김해등님의 글이 자극이 되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런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실력은 없습니다. 감히 욕심을 내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한구석엔 이런 분들과 함께 할수 있을만큼 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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