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기 열사의 고등학교 시절서강민주동문회
김의기 열사 역시 다른 학생들처럼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가 엄혹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남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막일을 하시는 부모님, 부석의 자투리땅에서 농사를 짓다 광산으로 가야했던 큰 형,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작은형과 누나, 그러한 빈곤한 환경에서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자라난 그가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가 되었다.
그는 마장동 단칸방에서 노동자인 형과 함께 잠들며 "왜 형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나?", "왜 없는 돈을 모아 부석의 큰형에게 보내줘도 형의 빚은 늘어만 가는가?"라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질문 속에서 그의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은 깊어졌다.
"슬프다. 우리 젊은 학도들이 학원 내에서 학업에만 열중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정치적 외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가"(78. 11. 23 김의기 열사 일기 중 일부 발췌)
질문을 행동으로 바꾼 열사 김의기
그의 문제의식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나타났다. 특히 학교에서 KUSA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유신독재체제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던 농민들을 돕고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었던 농촌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또 자신의 장래 전망은 농민운동이었지만 유신정권의 붕괴를 보며 졸업을 늦추었다. 그리고 80년 새학기와 함께 학생회 등 자율적인 학내 기구들을 부활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았다.
모든 운동 세력들이 신군부의 무자비한 검거 열풍에 휘말려 들어갈 때, 열사는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에 가게 된 이유나 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서울은 계엄령으로 인해 입과 귀가 막혀 있었다.
열사는 이를 알리기 위해 기독교회관으로 향한다. 그곳 607호에서 평소 같이 활동하던 변광순씨에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원문을 전해주었다. 뒤늦게 일의 심각함을 알게 된 변광순씨와 상동교회 청년국장이 서둘러 기독교회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50분경. 이미 열사는 가마니에 덮여진 채 두 대의 장갑차 사이에 있었다.
26년을 뛰어넘어 살아 있는 선배 김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