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아, 잘 살자. 열심히, 떳떳하게..."

열사 김의기,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았던 그 시절을 엿보다

등록 2006.05.18 15:54수정 2006.05.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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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열사의 명예졸업사진
김의기 열사의 명예졸업사진서강대 민주동문회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1980. 5. 30 '동포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서강대 무역학과 76학번 김의기. 그는 80년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80년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린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옥상에서 투신하였다.

2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를 열사라 부른다. 하지만 현재 대학생에게 열사라는 호칭이 가지는 부담은 열사의 일상적인 삶을 분리시키고 신화 시킨다. 과연 열사는 특별한, 다른 종류의 사람일까? 김의기 열사의 일기에서 새로운 그를 발견한다.

번역가를 꿈꾸던 청년 김의기

"희영아. 잘 자라. 내일 시험 잘 봐라."
(79. 12. 8 김의기 열사 일기 중 일부 발췌)

"싱그러운 머리칼 냄새, KISS, 아름다움.
열심히 한 주 살고 일주일 뒤에 만나자고
희영아, 잘 살자. 열심히, 떳떳하게...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79. 3. 27 김의기 열사 일기 중 일부 발췌)


시험 걱정을 하고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는 열사의 모습은 지금 대학생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은 그와 학교생활을 같이 했던 동문들의 증언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고등학교 시절. (…)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소개해 보겠다는 말을 김 열사는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3월 초, 학교 측에서 주관한 '신입생의 날' 행사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김 열사는 그날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던 '예쁜 남성 선발대회'에 몸소 출전, '날씬한 몸매'를 과시하며 통기타반주로 CM송을 골계적으로 변조, 열창을 아끼지 않았다. 단발머리 가발, 짧은치마, 정열적인 빨간 입술, 뛰어난 노래 솜씨. 그 진짜 같은 여자는 참석한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서강 민주 열사 자료집 중 김의기 평전 내용 일부 발췌)

슬픈 시대의 대학생 김의기

김의기 열사의 고등학교 시절
김의기 열사의 고등학교 시절서강민주동문회
김의기 열사 역시 다른 학생들처럼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가 엄혹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남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막일을 하시는 부모님, 부석의 자투리땅에서 농사를 짓다 광산으로 가야했던 큰 형,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작은형과 누나, 그러한 빈곤한 환경에서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자라난 그가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가 되었다.


그는 마장동 단칸방에서 노동자인 형과 함께 잠들며 "왜 형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나?", "왜 없는 돈을 모아 부석의 큰형에게 보내줘도 형의 빚은 늘어만 가는가?"라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질문 속에서 그의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은 깊어졌다.

"슬프다. 우리 젊은 학도들이 학원 내에서 학업에만 열중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정치적 외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가"(78. 11. 23 김의기 열사 일기 중 일부 발췌)

질문을 행동으로 바꾼 열사 김의기


그의 문제의식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나타났다. 특히 학교에서 KUSA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유신독재체제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던 농민들을 돕고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었던 농촌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또 자신의 장래 전망은 농민운동이었지만 유신정권의 붕괴를 보며 졸업을 늦추었다. 그리고 80년 새학기와 함께 학생회 등 자율적인 학내 기구들을 부활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았다.

모든 운동 세력들이 신군부의 무자비한 검거 열풍에 휘말려 들어갈 때, 열사는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에 가게 된 이유나 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서울은 계엄령으로 인해 입과 귀가 막혀 있었다.

열사는 이를 알리기 위해 기독교회관으로 향한다. 그곳 607호에서 평소 같이 활동하던 변광순씨에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원문을 전해주었다. 뒤늦게 일의 심각함을 알게 된 변광순씨와 상동교회 청년국장이 서둘러 기독교회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50분경. 이미 열사는 가마니에 덮여진 채 두 대의 장갑차 사이에 있었다.

26년을 뛰어넘어 살아 있는 선배 김의기

김의기 열사 생전의 모습
김의기 열사 생전의 모습서강민주동문회
"인간, 사람다움이라는 게 뭐냐, 사람스러운 게 어떤 건가. 술, 왕창, 이빠이, 해롱해롱. 희영. 미안스러움. 잘 자라. 내 사랑하는 이야, 고운 꿈꾸면서."(79 2.9 김의기 열사 일기 중 발췌)

"내가 뭘 하여야 한다는 걸 아는 게 무섭고 두렵다. 운동이며 혁명이며… 사랑한다. 희영아 내가 받아야 할 잔이 아니라면 도망치고 싶다. 정리를 하나씩 해나갈 필요가 있다. 내가 당장 없어진대도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게 되기 위해서라도."(79.2.24 김의기 열사 일기 중 발췌)


술을 즐기고,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지금의 대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던 청년 김의기 열사.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잉태한 것이다. 2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남도의 순백한 죽음들이 다가오는 따사로운 오월. 선배를 통해 다시 한 번 오월을 반추해본다.

덧붙이는 글 | 서강대학교  COMM.together에 기재합니다.

덧붙이는 글 서강대학교  COMM.together에 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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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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