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사진첩 펼치듯한 잔잔한 삶의 이야기

국립극단 특별공연 작 <우리읍내> 21일부터 8월 6일까지 공연

등록 2006.07.21 18:33수정 2006.07.2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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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옆집에 살던 동네친구 준기(김진서)와 결혼하는 영희(김마리아). 우리읍내는 현재 기준으로는 결코 평범치 않으나 오래 전에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들을 오늘처럼 전해준다

옆집에 살던 동네친구 준기(김진서)와 결혼하는 영희(김마리아). 우리읍내는 현재 기준으로는 결코 평범치 않으나 오래 전에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들을 오늘처럼 전해준다 ⓒ 김기


영화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전해진다. 시작 후 5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을 강력한 영화 속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예술에도 어지간히 통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줄거리나 주제를 떠나서 시작 바로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할 장치를 고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작 후 5분은커녕 1시간 30분 전체 공연시간 중에 단 한 번의 강력한 무엇 없이도 관객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는 연극이 있다. 국립극단(예술감독 오태석)이 21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올리는 <우리읍내>가 그것.


미국 작가 손톤 와일더의 1938년 작으로 6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제작되는 그의 대표작이다. 또한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오태석 감독이 직접 선택한 작품이다. 즉 이 작품부터 새 예술감독의 연극에 관한 시각이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연극은 본디 갈등의 예술이라 할 정도로 무대 위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과 대사, 몸짓은 일상의 그것들보다 좀 더 과장되거나 때로는 의도적 왜곡도 불사하기 마련이다. 요즘 연극들의 대화법은 텔레비전 묘사와 유사해진 경향도 있지만, 아직도 연극의 모든 요소들은 그 내면에 담긴 것들에 대한 상징화의 수단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읍내>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큰소리 나는 장면도 없고, 누구와 누구 사이에 조마조마한 갈등도 없고, 그 흔한 복선과 반전도 없다. 마치 부모님들의 낡고 오래된 사진첩 속에 담겨진 잔잔한 이야기들처럼 어쩌면 그 집안에서조차 잊혀졌을 지 모르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이 아주 담담하게 흐르고 있다.

a <우리 읍내>에는 사진첩에 꽂혀 있는 여러 장의 사진들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들이 중첩되 듯이 다른 공간과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 공존을 위한 안배로 무대는 세트나 소품을 극도로 제한하여 빈공간을 유지한다.

<우리 읍내>에는 사진첩에 꽂혀 있는 여러 장의 사진들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들이 중첩되 듯이 다른 공간과 시간들이 공존한다. 그 공존을 위한 안배로 무대는 세트나 소품을 극도로 제한하여 빈공간을 유지한다. ⓒ 김기


그래도 어쨌거나 기승전결의 구조는 존재하고, 그 사건들을 이끌어 가는 영희와 준기의 태어남과 죽음도 다큐멘터리 내레이션보다 훨씬 더 건조하고 덤덤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중간 중간 듣는 사람이 딱 놓치기 좋을 만큼 일상적인 말투로 소위 명언 혹은 아포리즘을 슬쩍 슬쩍 흘리기도 한다. 알릴 건 알리고 숨길 건 숨기는 표현의 기초가 무색해진다.

그런가 하면 연극에서 상황의 배경을 시각적으로 제공해주는 무대미술도 기대할 수 없다. 가끔 해가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달로 사용되는 커다란 원반이 하나 걸려 있고, 양쪽에 에이자(A) 형 사다리 두 개와 영희와 준기의 집을 의미하는 식탁 두 조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희네 집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10시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소품을 활용하는 상황들은 모두 맨발의 배우들이 마임으로 표현하게 된다. 먹고, 마시고, 읽는 모든 동작들을 이번 작품에서는 간만에 마임으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작품을 위해서는 좋은 연출가와 배우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작품은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으로 연출 경력 7년의 젊은 연출가 김한길이 맡았다.

주요 배역인 무대감독에는 우리의 연극의 산역사인 장민호 선생과 전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했던 권성덕씨가 교대로 출연한다. 그리고 영희와 준기 역에는 국립극단 연구과정에 있는 김마리아, 김진서씨가 맡았다.


이들이 내면으로는 뜨거운 열정으로 무대를 장식함에도 열연한다고 표현하기에는 이 연극의 특징상 어색하다는 점이 아쉽다. 낡은 사진첩을 넘기면서 입가에 물게 되는 잔잔한 미소 같은 장면을 아주 적절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a 영희의 장례식 장면, 장례식이니 슬픔을 조장할 것이란 예상은 빗나간다. 죽은 후에도 마을 공동묘지에 그대로 존재하는 과거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장례 혹은 산사람들의 세계를 말한다.

영희의 장례식 장면, 장례식이니 슬픔을 조장할 것이란 예상은 빗나간다. 죽은 후에도 마을 공동묘지에 그대로 존재하는 과거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장례 혹은 산사람들의 세계를 말한다. ⓒ 김기


<우리읍내>는 사진첩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사진첩 속에 담겨진 사진들이 비록 같은 공간에 배치되었지만 그것들이 기록된 순간과 공간은 서로 다른 법이다. 그렇지만 사진첩 속에 나란히 혹은 가까이 배치됨으로 해서 마치 시간과 공간이 혼재 하는 듯한 초월이 가능하다. 그것처럼 <우리읍내>에서는 읍내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일들과 시간들이 무대 속에 정지되어 공존한다.

세트나 소품이 극도로 제한된 <우리읍내>는 그렇게 사진 한 장처럼 정지된 모습들이 그것들을 대신하면서 세트보다 흥미로운 상상을 제공해준다.

이 연극이 사진첩 같은 이유는 더 있다. <우리읍내>는 액자 연극 기법이 골간을 이룬다. 해설자 무대감독이 지속적으로 등장해 현재 상황이 모두 연극임을 주지시킨다. 그러다가 빙수를 파는 가게주인, 결혼식 주례 등 극중 인물로 변신하기도 해 흥미로운 혼선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귀담아 들으면 일상의 철학 혹은 시의 한 구절 같은 대사를 선사한다.

연극평론가 송현옥씨는 “연극에 있어서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이다. 아무리 과거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극장 안에서는 현재 진행되는 사건이며, 아무리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관객과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바로 ‘지금/이곳’이 연극의 속성인 것이다. <우리읍내>는 이러한 연극의 속성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구조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a 죽은 영희는 떼를 써 산사람의 경계로 딱 하루 외출을 허락받는다. 그래서 찾은 어린날의 생일 아침. 그러나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죽은 영희는 떼를 써 산사람의 경계로 딱 하루 외출을 허락받는다. 그래서 찾은 어린날의 생일 아침. 그러나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 김기


그렇다. 오래된 사진첩이 단지 인화된 사진 몇 장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에게 주는 감성은 현재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스타의 사진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도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함께 먹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사진이다.

그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읍내>고, 바로 우리들 이야기이다. 그 평범함의 철학을 통해 신문에 이름 한 자 나지 않고 무던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삶이 대단히 소중함을 확인시켜준다. 그 평범함의 철학은 또한 시대를 장악하는 거대 이슈나 거창한 철학과 견주려 하지 않는 아주 낮은 목소리이다.

옆집과 사돈을 맺는 작은 읍내의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 그러나 지금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라서 <우리읍내>는 아주 오래 전 우리 읍내 이야기이다. 우리의 옛날보다 더 옛날에는 그토록 평범치 않은 일들을 사소하게 겪으면 살았던 것이다.

강조법에 역행하는 전반의 표현이 그렇듯이 그렇게 살자는 주장이 아니라 그렇게 살았더라는 속삭임 같은 이야기만을 전달해주는 <우리읍내>이다.

자극적인 요소 없이도 1시간 30분이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고, 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수예술의 진정한 힘이다. 그리고 순수예술의 힘을 증명해 준 <우리읍내>는 좋은 연극이다.

덧붙이는 글 | 공연시간: 평일 오후 7시 30분, 토 오후 4시, 7시 30분(2회) 일 4시
공연문의: 02-2280-4115~6(국립극장 고객지원실)

덧붙이는 글 공연시간: 평일 오후 7시 30분, 토 오후 4시, 7시 30분(2회) 일 4시
공연문의: 02-2280-4115~6(국립극장 고객지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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