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에서 앵그르를 만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앵그르 미술관

등록 2006.07.26 14:13수정 2006.07.2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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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돔 천장의 건물 ⓒ 최미숙

뚤루즈로 내려가는 길에, '몽토방'이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귀에 익숙한 이름인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분홍색 도시' 뚤루즈에 취해 몽토방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렀다. 별 기대 없이 마을 입구에 들어섰는데,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붉은 산 같은 마을 풍경이었다. 마을 전체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처럼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붉은 마을, 그 보색 대비가 숨이 막혔다.

13세기에 세워진 생-쟉크 교회는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는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지어진 가톨릭 성당이 있다.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이 강한 몽토방에 왕권과 가톨릭의 존재를 명백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성격이 다른 교회와 성당이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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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쟉크 교회 ⓒ 최미숙

프랑스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8차례의 종교 전쟁을 포함해서) 16세기 내내 일어났다. 캘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의 지도로 16세기 중반에는 약 200만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있었다. 가톨릭과 그를 후원하는 왕권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562년이었다.

3년간의 종교 전쟁이 끝난 뒤, 샤를 9세와 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새로운 화해의 방법으로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나바르 왕국(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동북부)의 왕자,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와 마그리뜨 드 발루아(마고 여왕)의 결혼을 주선한다.

교황과 가톨릭 극단주의자들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1572년 8월 18일 앙리 드 나바르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마그리뜨 드 발루와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6일 뒤인 1572년 8월 23일 자정, 파리의 생-제르맹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생-바르텔레미 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다른 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태도가 권력과 결합하면서 빚어낸 참극이었다. 영화 <여왕 마고>는 이 시기를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앙리 드 나바르는 왕이 되고 난 뒤 프로테스탄트의 수장 역할을 철저히 했다. 그는 1598년에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적 권리를 결국 획득했고, 약 60여개의 '안전 지대'를 확보했다. 몽토방은 프로테스탄트들의 가장 중요한 안전 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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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 미술관 ⓒ 최미숙

생-쟉끄 교회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 미술관을 발견했다. 그제야 몽토방이 귀에 익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를 찾아냈다. 몽토방은 앵그르가 태어난 곳으로, 미술사 책들을 어설프게 뒤적일 때 익혀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앵그르와 고대 - 그리스의 환상'이라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실 루브르 같은 박물관은 그 규모에 눌려서 눈도장 찍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렇지만 작은 미술관들을 만나면 근거 없는 정복욕이 생기고, 설명까지 곁들인 관람을 하고 나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이 남은 하루가 즐거워진다. 소박한 미술관 입구에 들어섰을 때, 앵그르를 만날 생각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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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여자 (1808) 루브르 ⓒ 최미숙

신고전주의파로 분류되는 앵그르는 1780년 몽토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실내 장식을 하는 장인이었다. 생-쟉크 교회에 있는 제단 하나도 그가 만들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그림에 입문을 한 앵그르는 뚤루즈와 이태리에서 수업을 받았고, 다비드의 제자가 되었으며, 라파엘의 팬이었고, 그리스 예술품의 광적인 수집가였다.

몽토방 미술관에서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은 것이 섭섭해서 루브르에 있는 앵그르 방에 다시 들렸다.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무료 관람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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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의 검에 입을 맞추는 톨레드의 돈 페드로 (1832) 루브르 ⓒ 최미숙

'앙리 4세의 검에 입을 맞추는 톨레드의 돈 페드로'

루브르에서 이 그림을 발견했을 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이것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몽토방에서 한나절을 보낸 뒤에 만난 그림이라 그런지 내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스페인의 외교 사절이었던 돈 페드로가 앙리 4세의 검에 존경의 표시로 입을 맞추는 장면을 앵그르가 그린 것이다. 종교 전쟁이 끝나고, 앙리 4세가 몽토방을 프로테스탄트들의 보호 지역으로 정한지 230년 뒤에 그려진 그림이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사라지는 법이지만, 기억은 촉각을 자극하는 사물 속에서 살아남기도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생-쟉크 교회에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보고 자랐을 앵그르가 앙리 4세를 기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다.

덧붙이는 글 | * 지난 6월 20일 부터 같은달 24일까지 한 프랑스 남부 지방 여행담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6월 20일 부터 같은달 24일까지 한 프랑스 남부 지방 여행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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