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를 먹지 않는 이유

말복 앞두고 '우리'의 사랑을 떠올려본다

등록 2006.08.06 10:03수정 2006.08.0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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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어제도 더웠고, 오늘도 덥다. 아마 내일도 덥겠지. 이런 더위를 이겨내려면 몸보신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말복이 얼마 안 남았군. 말복 때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생각해 본다. 뭘 먹지? 장어 요리? 삼계탕? 보신탕? 보신탕 하니까 생각난다. 예전에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 끝에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 먹으면 안 된다 말다툼을 벌였던 일.

나는 프랑스 여배우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 사람을 비난했다는 얘기에 "무슨 상관이야? 개고기 먹는 게 어때서?"하다가도 주변의 누군가 개고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아, 꼭 개고기를 먹어야 되는 거야?" 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었다. 나는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개를 학대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개를 먹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개고기를 먹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개는 내게 친구 같은 존재니까. 세상에 아무리 자기 몸을 위해서라도 친구를 먹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우리 집은 시골이다. 지금은 부모님만 계셔서 개를 키우지 않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때문에 집을 떠나기 전만 해도 우리 집에는 개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개와 노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런 친구 같은 개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쁘띠, 포미, 초롱이, 스칼렛, 검둥이…….

많은 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내 기억 속에 가장 깊게 남아 있는 개는 '우리'다. 우리 집에서는 개를 낳으면 네 자매가 누구 개, 누구 개 나누고는 했었다. 당시 우리 집에 있던 도사견이 새끼를 낳았는데, 딱 네 마리를 낳았다. 그 중에서 가장 순한 수컷 강아지가 내 강아지가 되었고 이름은 '우리'로 정했다.

나머지 개들은 이웃집에 가거나 큰댁에 가기도 해서 그때 '우리'의 형제 중에서는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도사견으로 '펄떡이'가 '우리'의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펄떡이는 내 동생의 개였는데, '우리' 엄마의 여동생, 그러니까 '우리'의 이모뻘인 개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펄떡펄떡, 아빠가 밥을 주려고 하면 좋아서 펄떡펄떡, 우리들이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반가워서 펄떡펄떡,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펄떡대서 결국 이름이 '펄떡이'가 됐다.

천방지축인 '펄떡이' 곁에서 다른 개들은 잘 견디지 못했는데 묵묵한 '우리'만은 '펄떡이'의 지나칠 정도로 활발한 성격을 잘 받아 주었다. 그래서 둘은 사이좋게 잘 지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모와 조카 사이라는 이유에서인지, '펄떡이'의 지나친 성격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는지 아빠는 '펄떡이'를 팔아 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펄떡이'가 없는 '우리'는 외로워 보였고 힘들어 보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밤이 되면 울었다.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하는 첫사랑 소년처럼 그렇게 아파했다. 나는 그런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학교 다녀와서 '우리'의 슬픈 눈을 보면서 나보다 훨씬 덩치 큰(그때 나는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다)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거나 밥그릇에 물을 한 바가지 부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죽어버렸다. 아직도 '우리'의 우는 소리가 생각난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사랑'이었다. '우리'의 사랑. 그때 세상을 떠난 '우리'를 아빠가 뒷산에 묻었는지(아빠는 강아지가 죽으면 뒷산에 묻고는 했다) 아니면 개 장사하는 아저씨에게 주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 있었던 그 많은 개들, 나와 함께 추억을 나눈 그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 결국은 죽었을 것이고, 어쩌면 죽기 전에 사람들의 몸보신을 위해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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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큰댁 할머니와 함께 사는 '육년이'. 2006년에 태어나서 '육년이'가 되었다. ⓒ 김화영

우리 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본 강아지는 '육년이'이었다. 욕이 아니다. 이웃집에서 수컷 강아지 한 마리, 암컷 강아지 한 마리를 주었고, 2006년이니만큼 남자는 '이천이', 여자는 '육년이'로 지었던 것이다. '이천이'와 '육년이'는 큰댁 할머니께 드렸다. 가끔 생각한다. '이천이'와 '육년이'도 나중에는 자라서 다른 사람들 몸을 보신하기 위해 그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은 나를 괴롭게 한다. '우리'의 슬픈 울음소리,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육년이', 그리고 내 기억 속 많은 개들. 개들에 관한 많은 추억들 때문에 앞으로도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먹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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