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영혼의 감옥'이다

[프랑슈-꽁떼 여행기] 쿠르베의 오르낭 집에서

등록 2006.11.10 11:54수정 2006.11.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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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영혼의 감옥'이다. 영혼이라는 말에 묻어 있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와 느낌을 다 걷어내고 보면,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삼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하는 도시인들에게 집은 잠시 머무는 쉼터일 뿐이지만, 텃새처럼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집은 기억의 감옥이다.

태어난 곳에서 자라는 일은 그의 혼을 집에 심는 일과 같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다락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바꼭질을 하거나, 식탁에 앉아 동생들과 툭탁거리며 싸우거나, 거실 화병을 깨고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는 것 같은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은 기억의 뜰에 촘촘히 박힌다.

그리고 세월이 길게 흐른 어느 날, 문득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거나, 다 낡아빠진 식탁에 앉을 때, 시큼하면서 달착지근한 엄마의 냄새를 맡을 때, 나는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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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가 태어난 집 ⓒ 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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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의 집에서 바라본 풍경 ⓒ 최미숙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가 태어나서 자란 오르낭(Ornans)의 집을 보면, 그의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정서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집 앞으로 흐르는 시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절벽, 가까운 곳에 자리한 울창한 숲….

아버지의 뜻대로 파리로 올라간 시골 청년 쿠르베에게 오르낭은 그의 영원한 안식처, 기억의 저장고였을 것이다. 파스퇴르가 고향 아르부와를 잊지 않고 찾았듯이, 아르부와에서 불과 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오르낭은 쿠르베의 그림들 속에서 끊임없이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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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낭의 풍경 ⓒ 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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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낭의 장례식(1849-1850, 오르세 미술관) 315x668 ⓒ 최미숙

교회 뒤편으로 보이는 골짜기의 절벽은 '오르낭의 장례식'(1849∼1850)의 배경이었다. 이 그림이 1850년 파리의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유는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아름답지 않고, 사실적으로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조각상들을 본뜨고 있는 앵그르의 매끈한 미남 미녀들과 비교해 볼 때, '오르낭의 장례식'의 사람들은 대부분 괴기스러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탐욕스럽고 무심해 보이는 사제들, 슬픔을 애써 감추고 근엄하게 서 있는 남자들, 그 옆에서 하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젊은 여자들, 그 뒤로는 주름투성이의 늙은 여자들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버지에, 친척에, 동네 사람들까지 동원했다는 장례식의 모델들은 19세기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현장에서 걸어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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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낭의 장례식(부분) ⓒ 피에르 쿠르티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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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낭의 장례식(부분) ⓒ 피에르 쿠르티옹

'오르낭의 장례식'은 19세기 중반에 있었던 문학계의 사실주의 논쟁에 휘말리기도 하는데, 쿠르베의 친구이며 작가인 샹플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르낭의 장례식'이 … 가장 훌륭한 근대적 작품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친구는 … 우리 얘기를 한참 동안 듣고 나서는, 좀 재밌게 사실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고백을 했고, 그것을 표현하기를, '공화주의자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자이며 사실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구스타브 쿠르베>, 미셸 라공, 화이야, 138페이지)

자신감이 넘치고, 고집이 세고, 수다스러우며, 늘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쿠르베가 평생 존경한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피에르-조셉 프루동(1809∼1865)이었다. 쿠르베보다 열 살 정도 연상이었던 프루동은 노동자 출신으로 철학자이며, 사회주의 이론가였다.

25살짜리 풋내기 카를 마르크스도 그를 만난 일화가 있다. 노동자는 그 자신의 힘으로 해방돼야 한다는 프루동의 생각은 마르크시즘에 흡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프루동은 마르크스와 다르게, 혁명의 권력 수립에 반대하고, 이성의 종교를 세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권력도 없고, 정부도 없고, 심지어는 대중도 없다. 그러나 혁명은 있다."(<소유란 무엇인가?> 위의 책, 23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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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피에르-조셉 프루동의 얼굴 (1865, 프티 팔레 미술관) 147x198 ⓒ 피에르 쿠르티옹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쿠르베와 노동자 출신의 프루동은 서로 처지는 달랐지만, 도시의 산업 문명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고향 집과 대지, 즉 그들이 나고 자라서 혼을 키운 땅과 그 문화를 끊임없이 그리워했다.

쿠르베는 프루동에게 자신의 사실주의적 화풍에 대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분석을 기대했고, 프루동은 쿠르베의 그림들을 배경으로 사실주의 예술론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들의 우정과 연대는 1865년 프루동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쿠르베는 '1853년, 피에르-조셉 프루동의 얼굴'에서 그의 스승이자 친구를 자상하게 기억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8월 2일부터 8월 10일까지 프랑스의 프랑슈-꽁떼 지방을 여행한 경험담입니다. 이 글을 위해서 책 <쿠르베>(피에르 쿠르티옹,플라마리옹,1996)과 <구스타브 쿠르베>(미셸 라공, 화이야,2004)를 참조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지난 8월 2일부터 8월 10일까지 프랑스의 프랑슈-꽁떼 지방을 여행한 경험담입니다. 이 글을 위해서 책 <쿠르베>(피에르 쿠르티옹,플라마리옹,1996)과 <구스타브 쿠르베>(미셸 라공, 화이야,2004)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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