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한 뺏기지 말아야 할 것

대추리를 다녀와서

등록 2006.12.11 18:36수정 2006.12.1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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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 주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주민들의 초대를 받고 가는 것도 안됩니까?"

"상부로부터 전혀 연락받은 바 없습니다. 이곳은 군사지역이어서 허락 없이는 못 들어갑니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아무 이유없이 시민을 제지하거나 검문하는 것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발표한 것도 모릅니까? 우리는 보통 시민인데 왜 죄인 다루듯 합니까?"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 경찰과 아무 상관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부의 지시만 받을 뿐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 나는 마치 국경을 몰래 넘으려다 들킨 조국해방 운동가쯤 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다. 그러나 내가 차 안에 갇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공권력에 짓눌리고 있는 그곳은, 대한민국 땅이었고 서울에서 두 시간도 채 안 걸리는 평택이었다.

노인과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20대 젊은이라고는 달랑 두 명뿐인 우리들 일행이 굳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너무나 당당하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불온(?)한 단체명이 적힌 차량을 타고 '대추리'에 들어가려 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시비와 대치가 길어지자 의례적으로 길을 막고 서있던 전경들의 숫자가 슬금슬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자 차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어르신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지금 우리를 뭘로 보는거야? 우리가 무슨 시위대야? 칠십 노인을 붙잡아 가기라도 하겠다는 거냐구?"

나도 화가 나서 차에서 내려 우스꽝스런 풍경 속으로 겁도 없이 저벅저벅 다가갔다. 나름대로 황금같은 토요일 오후를 반납하고 내달려온 성의가 무의미하게 내던져지는 것은 아닐까 초조해졌다.

이제 갓 스무살 남짓한 전경들이 비틀비틀 끼니도 못 챙겨먹은 행색으로 열을 맞춰 방패를 들고 서있는 모습은 자꾸만 눈에 거슬리고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사복 경찰 같기도 하고, 기자 같기도 한 두 사람이 검문초소에 온 뒤에야 우리는 겨우 대추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 대추리 방문이었다. 모두 내가 다니는 향린교회에서 깃발을 들 때 비척비척 따라왔던 것이다. 처음 대추리를 찾았을 때 목격한 새까만 전경들의 행렬과 주민들의 노기 띤 얼굴, 아무렇게나 짓밟혀진 논과 밭, 철조망 너머 안전한 구역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듯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던 미군들의 잔상이 아직 선명하다.

순전히 종교인들로 구성된 평화행진이었는데도 우리들은 마치 우리나라에 귀빈으로 온 미군들을 위협하기 위해 몰려든 폭도 취급을 받으며 가는 길마다 봉쇄를 당해야 했다. 미군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집안 식구들끼리 싸우는 형상으로 남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그 순간이 치욕스럽고 참담했다.

그러나 내가 느낀 치욕은 모욕도, 희롱도 아니었다. 146가구 4백여 주민들이 평화롭게 지내며 비옥한 농토에서 기름진 쌀을 거둬들이던 대추리의 오랜 역사와 뿌리가 무지하고 교활한 발길질에 채이는 것에 비한다면, 내 몸이 방패에 밀려 흙더미에 나가떨어진다 한들 울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자괴감으로 나는 그 뒤로 한번도 자발적인 의지로 대추리를 찾지 못했다. 나의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대추리에 갔던 날도 역시 나는 향린교회 교우들 틈에 낀 무명인이었다. 낯익은 풍경 가운데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기막힌 풍경이 나를 압도했다. 초등학교 건물이 운동장만 남기고 완전히 부셔져 건축물 쓰레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고 대추리 주민들과 모처럼 풍물을 치며 한바탕 잔치 분위기를 낼 때에도 내 신경은 온통 사라진 학교의 잔해에 쏠려 있었다. 마치 그 건물더미 속에 연약하고 어린 아이들이 깔려서 버둥거리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너희들이 밥 먹고, 배 깔고 누워 자던 집들도 한 순간에 깡그리 무너뜨릴 수 있어. 어때, 무섭지? 돈 줄 때 빨리 손털고 나가라구!' 무서운 메시지였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파괴한 행위는 대추리 주민들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것을 가장 무섭고 잔인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공권력의 위력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내 집 안방에서 잠자고 있을 때 도둑처럼 몰래 들어와 명줄을 끊어놓을 수 있는 야비하고 섬뜩한 위협이란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날(12월 9일) 마을 초입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늦게 도착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 대추리 주민들은 이제 46가구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윤기가 흐르는 찰진 쌀가마니로 가득 찼을 마을창고의 촛불행사에는 그나마 삼십명도 안 되는 인원이 스티로폼 깔린 찬 바닥에 앉아 있었다.

창고의 높은 천정이 오히려 황량해 보이는 그곳에서 830일째 촛불행사를 이어가며 시린 가슴을 맞대는 그들과 함께 짧은 시간을 보냈다.

향린의 아름다운 파랑새인 전경옥님이 '힘을 내거라 강으로 가야지 흐린 물줄기 이따금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뒤엉켜 가거라'하고 선창하면 우리들은 '냇물아 흘러흘러 강으로 가거라 맑은 물살 뒤척이며 강으로 가거라'하고 힘차게 뒤를 이어 노래를 불렀다.

대추리 주민을 대표해서 답가를 부른 박성민씨의 '평화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 갈거야'라는 노래는 구성진 창과 가요가 어우러져 어르신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다.

대추리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겨울에 심어야 하는 마늘과 시금치, 보리를 얼마 전 심었노라고 수줍게 얘기하는 젊은 지킴이들이 외부에서 대추리로 들어와 수 개월 혹은 해를 넘기며 살고 있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기리며 마당 한 켠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집도 있다. 기름보일러 보다 연탄보일러가 훨씬 경제적이라며 난방 교체작업을 하는 주민도 있다. 주민의 70%가 떠난 그곳에는 그렇게 이 겨울을 지내며 살아가는 주민이 아직도 백 명 가까이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논과 밭에 나가 부지런히 일하고 하루 세 끼 소박하게 챙겨 먹으며, 자식 키우듯 벼이삭 자라는 것을 보고 살았을 대추리 주민들에게 더 이상 벼가 자랄 논이 없어도, 일부러 차를 타고 멀리 학교를 다녀야 하는 서러운 핍박의 현실이 가로막아도 살아 있는 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대추리 역사의 새로운 한 장, 한 장을 써나가는 것으로 변해버린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인내와 의지로 버티고 있는 그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무리 망국병인 치매에 단체로 걸린 대한민국 국민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기억들이 있다. 깜깜한 시골길에 세 집 건너 한 집마다 불이 켜진 대추리 속으로 우리의 삶이 함께 불을 켜고 들어가 있어야 한다.

허깨비 같은 전경들이나 현 정부가 아니라 진짜 우리의 혼과 미래를 꺾어놓으려는 실체가 무엇인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일조차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인가? 이미 죽은 것인가?

권력도 자본도 먹혀들지 않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과 삶이 그곳에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찾아가서 보고, 또 나와서 알려야 한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내가 선택한 삶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덧붙이는 글 | 향린교회 게시판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향린교회 게시판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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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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