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대출 천국' 만든 참여정부
민생의 바다에서 해결책 찾아라

대통령이 생각을 바꾸면 국민이 행복해진다

등록 2007.03.07 09:08수정 2007.07.08 18:13
0
원고료로 응원
a

'약탈적 대출'을 막는 채무자 보호제도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사진은 2002년 고리사채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민주노동당원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최근 진보논쟁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해 보건대 필자는 진보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의 경제적 약자 보호제도의 도입을 주로 주장하고 있지만 유럽의 사민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 필자이기에 딱히 구분 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자유주의적 개혁론자 정도가 적절할 듯싶은데, 민생을 위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 그런 이념적 잣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소신이기도 하다. 그런 필자가 진보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이지만 자주 거론되는 민생문제에 대해서 조금 다른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약탈적 대출 천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BRI@필자가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이라는 개념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것이 2001년 하반기부터였다. 약탈적 대출은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어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면 전적으로 채무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 미국 사례를 살펴보니 정부기관이나 검찰, 각종 단체 등 많은 기관에서 약탈적 대출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고, 실제로 세계적인 금융기관이 약탈적 대출로 인한 소송으로 인해 천문학적 액수를 물어내기도 했다.

약탈적 대출은 자금의 조달비용과 대출이자율 사이의 차가 충분히 클 때, 또 돈을 갚지 않는 채무자에게 강한 채권추심이 가능할 때 기승을 부린다. 따라서 일본이나 유럽과 같이 이자제한법이 엄격히 적용되거나, 과거의 한국이나 개발도상국과 같이 자금 조달비용이 높은 경우에는 약탈적 대출은 자동적으로 제약을 받는다. 반면 미국에서는 공정채권추심법이라든가 채무자에게 관대한 파산법 또는 약탈적 대출을 직접적으로 처벌하는 채무자 보호제도를 통해 약탈적 대출을 억제한다.

따라서 외환위기 이후 이자제한법이 폐지되었으나 저금리상태로 접어든 1999년 이후 채무자보호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한국에서 약탈적 대출이 만연하게 된 것은 정책당국의 무관심과 무지의 결과이다. 대표적인 사례인 이른바 신용카드 대란은 약탈적 대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아직도 연이율 200%가 넘는 살인적 고금리가 판을 치는 불법 대부업으로 서민 가계가 초토화되고 있다. 공식 대부업이나 금융기관 역시 무분별한 대출이 이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또한 상환능력을 따지지 않고 대출해 주는 주택담보대출로 인해 대규모 가계 부실이 우려되는 등 약탈적 대출에 따른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

a

연이율 200%가 넘는 살인적 고금리로 서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지난해 10월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는 불법사채광고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 5년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이러한 약탈적 대출에 따른 피해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촉구해 왔지만 약탈적 대출이라는 개념조차 거부한 것은 바로 대통령이 총애하는 경제관료, 금융관료들이었다.

그 결과 채무자에게 관대한 파산법, 공정채권추심법, 이자제한법과 DTI 규제 등으로 구성되는 약탈적 대출 억제를 위한 정책 입안에 대해 참여정부는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일관해 왔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요구가 있을 때 그야말로 마지못해 책임회피용 대책만을 내놓았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약탈적 대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했던가? 이건 진보, 보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신자유주의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미국에서 레이건 시대에 신자유주의적 금융완화가 가능했던 것은 1980년대 이전까지 확립된 채무자보호제도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 미국식 채무자 보호제도가 없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상황은 채무자 보호제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인 1930년대 이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 최근 미국에서 주택담보대출문제로 다시 약탈적 대출이 논의되고 있으나 채무자 보호제도가 약한 한국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은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 유래가 없는 약탈적 대출의 천국이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나름대로 억제책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을 참여정부만이 끝까지 반대해 온 결과다.

참여정부, 여야 정치인 다수 그리고 일부 언론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약탈적 대출을 억제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야당이나 일부 언론 때문에 참여정부의 정책이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근거를 찾기 힘들다.

대통령이 총애하는 경제관료, 금융관료들이 끝까지 반대했지만 시민사회의 노력과 일부 정치권, 대법원의 수용으로 그런대로 채무자의 숨통을 트여줄 수 있는 파산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약탈적 대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이자제한법의 제정도 논의 중이다. 이것 역시 최후의 반대세력은 대통령이 총애하는 경제관료, 금융관료였다.

지난 5년간 필자가 그토록 주장했던 주택담보대출에 있어 DTI(총부채상환비율) 기준을 적용하는 것도 부동산 가격 폭등 이후 사후약방문식으로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그 과정에 참여정부는 조금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에 와서 참여정부가 이러한 입법에 생색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우리는 결국 약탈적 대출을 근본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낼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통령은 약탈적 대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약탈적 대출과 관련한 합리적 논의에서 철저히 격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 학자의 문헌은 물론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고 관료들은 철저히 용어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회에서 약탈적 대출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미국의 수없이 많은 공공기관이 홈페이지 첫 면에 약탈적 대출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행히도 우리 국민들만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약탈적 대출의 참상은 아마도 자본주의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근로소득 가계를 붕괴시킨 참여정부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참여정부의 부동산 통계가 엉터리임을 밝혔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사상 유래가 없는 최악의 현상이며, 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특히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근로소득자의 실질소득이 크게 줄었지만 정부의 공식 통계에는 이런 실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근로소득자들이 앞으로 수십년간 열심히 일해도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민생이 파탄나지 않았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a

지난해 11월 아파트값 거품빼기 국민행동을 벌이는 경실련 회원들이 서울 세종로 네거리 동화빌딩앞에 텐트를 설치한 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며 시민들에게 캠페인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서도 참여정부와 여야 정치세력, 참여정부에 반대한다는 일부 언론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보유세와 관련해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 공공주택건설이나 주택담보대출과 관련한 정책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미 폭등한 부동산 가격을 현 상태로 유지시키겠다는 목표에 있어서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최근에는 그동안 야당과 일부 언론이 주장하던 공급부족론을 경제관료, 건설관료들이 되뇌더니 청와대도 같은 원인 진단을 했다는 보도도 있으니 이제는 부동산 가격 폭등의 원인에 있어서도 의견이 일치한다.

이 문제 역시 진보 보수적 입장이나 신자유주의와 큰 연관이 없다. 미국의 후분양제, 보유세제와 주택담보대출 제도를 도입하면 부동산 가격은 당장 폭락한다. 유럽의 공공보유주택제도를 도입해도 부동산 가격은 폭락한다. 부동산 분야 역시 효과적인 공공대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서구의 1930년대 이전 천민자본주의 시대와의 유사성이 더 크다.

참여정부에서 공공보유주택 즉 임대주택의 확충 의지는 있으나 예산이 없어서 못한다는 주장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공급부족 운운하는 참여정부와 정치인, 일부 언론은 부동산가격 폭락을 바라지 않는다는 내심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원하고 한국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막고 있는 연합세력인 셈이다. 여기서도 야당이나 언론 때문에 정책 효과가 발휘되지 못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참상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중차대한 정책적 실패이다. 특히 투기꾼과 건설족을 위해 정부 스스로 분양가 거품을 조성한 것은 사상 유래가 없는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부동산 정책의 실패에 대해 재경부, 건교부, 국세청, 감사원, 검찰, 금감원에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조사를 한다면 국민들은 환호할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은 '바다이야기'뿐이라는 대통령의 한 마디에 도박으로 인해 신음하던 수많은 서민 가계가 구제되지 않았던가? 1년이라는 시간이 부동산 가격 안정을 통해 한국경제 회생의 틀을 마련하기에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민생을 파탄 낸 참여정부

대통령이 경제성장률이 높기 때문에 민생이 파탄 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동안 양극화의 심각성을 지적하던 대통령의 모순적 발언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양극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경제성장률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국민들의 체감성장률은 국내총생산(GDP)보다는 국민총소득(GNI)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교역조건의 악화로 국민총소득의 성장률은 형편없다. 또한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국민소득 증가율과 가처분소득 증가율이 가장 많이 차이가 나는 국가에 속한다. 그런데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면 저소득층의 삶이 그전보다 훨씬 더 악화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a

지난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올 한해 서민생활 안정과 양극화 문제 해결 등 경제살리기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으나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남소연

노동소득분배율이 참여정부 들어 다소 낮아지거나 그전과 대동소이한데, 최근 들어 연봉제 등으로 고소득 봉급자들이 대거 증가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중산층 이하의 가계는 그전보다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가계소득 통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적자 가계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통해 서민 가계가 피폐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통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모르는 비전문가가 통계의 의미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극화 극복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대통령이 성장률이 괜찮으니까 민생파탄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이제 성장률을 중시하는 야당이나 일부 언론의 시각을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과 같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도 이들 핑계를 대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참여정부에서 복지정책을 강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끊임없이 예산이 부족해서 복지정책을 강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OECD 국가 평균과 비교하여 복지예산이 터무니없이 적은 반면 불필요한 건설예산이 많다. 그렇다면 건설예산을 줄여서 복지예산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나 건설예산을 줄이기는커녕 미래의 예산까지 미리 갖다 쓰기 위해 BTO(수익형 민자사업)나 BTL(임대형 민자사업)이라는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건설예산을 줄이기 위해 최저가 낙찰제를 전면 도입하자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철저히 외면해 왔다. 참여정부의 복지정책이 생색내기에 그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대통령은 경제관료들이 주장하는 복지강화정책이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복지정책과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참여정부의 미래 비전인 '2030계획'이 왜 홀대받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아직도 경쟁에서 낙후된 자들을 위한 전근대적인 구휼적 복지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한계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복지인 구휼적 복지를 조금 늘였다고 자랑하는 참여정부의 모습이 안쓰럽다. 경제구조개혁을 통해 7%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겠다고 공약한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

누구를 위한 한미FTA인가

최근 한미FTA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유명 경제학자들을 개방 반대론자들로 보기 어렵다. 필자 역시 개방을 반대한 적이 없다. 필자가 강조하는 소비자 중심적 경제운용에 있어 개방은 오히려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재경부의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에 반대하는 논리이다. 외환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하는 것은 수출기업에게 유리할지는 모르겠지만 소비자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는 행위이다. 특히 막대한 외환관리비용이나 환차손을 부담하면서 외환 보유고를 늘리더니, 이제 와서 그 외환을 운용하겠다고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하는 참여정부의 정책을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더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외국계 은행을 비롯하여 국내에 들어온 은행들이 대규모로 단기외채를 들여와 그 규모가 천억달러에 달한다는 보도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은행들의 막대한 수익을 국민세금으로 메워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참여정부는 개방경제의 기본을 모르고 있는 정부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참여정부가 한미FTA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통상교섭본부의 극단적 개방론자들과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당연시 여기는 재경부의 관치론자들은 양립하기 어렵다. 그런 그들이 한미FTA라는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것은 매우 기형적이다. 그런 기형성으로 인해 개방의 목표로 거론되는 소비자 권익 보호를 비롯한 경제구조의 개혁과 같은 중요한 논제들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a

통상교섭본부의 극단적 개방론자들과 금융·외환시장 개입을 당연시하는 재경부의 관치론자들이 한미FTA라는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것은 매우 기형적이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제주 서귀포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미FTA 4차 본협상 전체회의.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미FTA를 통해 제도의 선진화를 추구하겠다는 정부에서 온갖 관치가 난무하고 책임을 져야 할 관료들이 낙하산 인사로 출세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버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국과의 FTA를 추진하려면 그런 구태를 일소하고, 최소한 미국이 제도화한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제도를 연구하고 도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미국의 소비자, 노동자 보호장치, 피해산업 보호장치 등을 도입하는 것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가 추진하는 FTA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은가? 만일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보호장치를 강화하고 관치와 재벌 위주의 경제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한미FTA를 추진한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민생의 바다에서 진실을 보다

지금은 경제학계에서 케인즈학파가 주류의 양대 산맥 중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케인즈의 이론이 처음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 미국의 대학원생들은 지도교수 몰래 동아리에서 돌려보면서 그 이론을 익혀야 했을 정도로 당시 주류의 경제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이단적 이론이었다.

그 이론의 핵심서인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 정식 출간된 것이 1936년이니, 대공황의 충격이 극심하던 1933년 3월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루즈벨트의 위대성은 그 어떤 경제이론보다도 민생을 좌표로 정책을 추진한 점에 있다. 민생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적 고전학파 경제이론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근로소득에 대한 누진세의 추진은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자유주의 지식인들도 모두 돌아서게 만들었다.

거기다 끊임없이 기득권세력과 보수언론으로부터 좌파로 비난받았다. 기댈 곳 없는 그는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노변정담'이라는 라디오 담화 형식을 적극 활용했다. 오직 민생의 바다에서 진실을 보고 해결책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특히 서민과 노동자들이 그 누구보다도 기대를 많이 했었다. 만약 그들이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대통령의 지지도가 높아졌다면 우리 정치의 오래된 숙원인 지역구도의 청산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이 그 모든 기대와 희망을 접었다. 기대와 희망이 컸었기에 실망도 더욱 크게 느껴진다. 앞으로는 희망조차 갖기 두려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한다.

참여정부의 공헌이 왜 크지 않겠는가? 그 공헌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왜 섭섭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서민을 살릴 힘을 가진 대통령이, 참여정부는 잘못한 게 없다고 강변하며 민생이 파탄 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일 것이다.
#한미FTA #대출 #이자제한법 #근로소득 #민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렇게 어렵게 출제할 거면 영어 절대평가 왜 하나
  2. 2 궁지 몰린 윤 대통령, 개인 위해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나
  3. 3 동네 뒷산 올랐다가 "심봤다" 외친 사연
  4. 4 '파묘' 최민식 말이 현실로... 백두대간이 위험하다
  5. 5 헌재는 지금 5 대 4... 탄핵, 앞으로 더 만만치 않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