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쌍굴다리엔 오늘도 기차가 달린다

[현장] 노근리 학살 희생자 위령제에 다녀오다

등록 2007.03.15 10:21수정 2007.07.0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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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 하얀 동그라미 속에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 김교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하루에도 수십 차례 경부선 기차가 지나는 쌍굴다리 뒤쪽 언덕 위에는 노근리 학살 희생자들의 위령비가 서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노근리 학살 현장에 세워진 위령비지만, 유명세에 비하면 크기가 작아보였다.

학살이 일어난 후 57년이나 지난 2007년 3월 10일 오후 3시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충북지역 사회단체 회원과 시민 30여명이 모여 이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위령제를 지내기 몇 시간 전만해도 날이 맑았다. 그런데 위령제를 지내려 하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비가 내리려 했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날씨가 급변하는 게 어떤 징조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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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 현장임을 알리는 게시판. 그러나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안내문은 없다. ⓒ 김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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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 김교진


먼저 노근리 희생자 유족회 부회장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1950년 7월 25일, 피난민 속에 간첩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군은 피난민들을 적군 대하듯이 총으로 쏴 죽였다. 피난민 중에는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도 많았다.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살아야 했다."

정말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미군의 집단 학살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994년 월간 <말>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지만 주류 언론들의 침묵으로 노근리는 다시 묻혔다. 노근리의 역사적 진상이 널리 알려진 건 우리나라 언론이 아니라 미국 언론을 통해서였다. 이제 세상에 알려질 만큼 알려진 노근리 학살사건이지만 보상과 명예회복, 추모공원 설립 등 문제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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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다. 뒤쪽에 쌍굴다리가 보인다. ⓒ 김교진


위령제 동안 내리는 비, 원혼들의 눈물인가

빗방울이 제법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령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절을 하고 나서 도법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장이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도법 순례단장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작은 종을 울리며 염불한 후 영가(靈駕)에게 보내는 제문을 낭독했다.

"생명평화 순례 대중이 오늘 이 자리에 조촐한 제상을 마련하고 영가의 왕림을 청합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의 역사는 평화와 영광보다는 투쟁과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습니다. 하나의 강토, 하나의 역사, 하나의 문화, 전통 안에서 한 민족, 한 가정, 한 형제로 태어났으면서도 오랫동안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같은 인간, 같은 민족, 같은 눈빛을 지닌 형제자매인데도 남과 북으로 갈라서서 원한과 복수의 칼을 가는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도대체 한반도를 살상과 파괴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좌익은 무엇이며 우익은 무엇입니까? 한 민족, 한 형제의 가슴에 총을 겨눴던 우리들 가운데 누가 잘한 자이며 누가 잘못한 자입니까? 이제 인간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지난날의 이념으로 인한 얽히고 설켰던 불신과 증오와 복수의 감정에 연연하지 맙시다. 진정 얽힌 것을 풀어내고 맺힌 것을 녹여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한반도의 본래 모습, 우리 민족의 진면목은 한 민족, 한 형제였습니다. 생명본연의 자리에는 탐욕을 부리고 집착해야 할 그 무엇도 본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자리에는 분열하고 대립하며 죽이고 빼앗아야 할 그 무엇도 본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야 할 생명의 고향인 그곳에는 영원과 무한, 자유와 평화의 빛이 가득합니다. 회복해야 할 우리의 고향인 민족의 한마당엔 함께 살아야 할 하나의 큰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념으로 인한 불신과 분노와 원한으로 얼룩진 역사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우리 모두 한 생명, 한 민족, 한 형제로 만나고 얼싸안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민족사의 비극이었던 이념으로 인한 분노와 원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마련됐습니다. 분노와 증오, 원한과 복수의 미련한 집착을 모두 끊어버립시다. 그리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참회합시다.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 모두 관용의 마음을 지닙시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맞잡고 다함께 깨달음의 광장에서 대자유, 대평화의 삶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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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장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는 염불을 하고 있다. ⓒ 김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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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하고 있는 도법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뒤로 <야생초편지>를 쓴 황대권씨 모습이 보인다. ⓒ 김교진


제문이 낭독되는 동안 비가 더 세차게 내렸으나, 참가자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숙연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제문읽기가 끝나자 도법 순례단장은 요령을 울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비석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참가자들도 그 뒤를 따르며 나무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외우며 영혼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하늘에선 영혼들의 슬픔을 보여주려는 듯이 굵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불어 나무가 울고 산천이 흔들리는 듯했다. 이 비는 영혼들이 흘리는 눈물이리라. 위령제에 와서 실컷 눈물을 흘리고 갔으니, 영혼들도 남은 한이 없을 것이리라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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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장과 참가자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위령비 주위를 돌고 있다. ⓒ 김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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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탁발순례단원들이 비를 맞으면서도,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김교진


거제·대전·노근리 등으로 이어진 평화 위령제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은 전국을 돌면서 만나게 되는, 한국전쟁 당시 좌우 이념대립으로 희생된 학살 현장에서 위령제를 하고 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 대전형무소, 진도, 곡성, 상주, 경주, 칠곡, 서산, 홍성 등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이 땅 어느 곳인들 좌우 대립의 상처가 남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생명평화를 말하려면, 먼저 이념대립으로 생긴 증오부터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념대립은 한반도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50여년 전 한국전쟁 때 총과 칼로는 이념대결을 끝내지 못했으니 이제는 사랑과 자비와 관용의 힘으로 이념대결과 증오심을 없애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도법 순례단장을 비롯한 신부, 목사, 승려들이 생명평화결사에 나섰고 대중이 그 뒤를 따라 국토 순례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인 불신과 증오의 벽을 단번에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벽이 아무리 단단해도 생명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벽을 밀면 오래 가지 않아서 벽은 무너질 것이다.

생명평화결사는 "생명평화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고 전한다. 남 탓만 하고 있어서는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나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부터라도 바른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 #생명평화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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