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 봄 맑은 날에 수루에 홀로 앉아

[국립공원관리공단 40일 도보순례 참가기 ①] 통영 비진도와 한산도

등록 2007.05.07 00:05수정 2007.05.0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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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도보 순례 깃발 ⓒ 김은주

남도의 들녘에는 자운영이 한창이다. 연초록 새 잎 사이로 드문드문한 산벚꽃 또한 곱고 환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은 이른 봄 나뭇잎들이 내놓는 그 여리고 고운 나뭇잎의 색깔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 따뜻해지는, 겨우내 마르고 서걱서걱하던 마음밭에 온기가 전해지는 그런 빛깔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여린 초록 사이로 가끔 진달래의 여린 분홍이 깃들고 화려한 동백의 붉은 기운이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새 봄의 기운을 함빡 머금은 통영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그래서 내내 환한 연초록이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통영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가 넘어서다. 윤이상의 고향이고 곳곳에 이순신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땅이며 내가 좋아하는 충무김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통영이다. 통영 유람선 터미널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유의 배 '국립공원 101호'를 타고 비진도를 향해 달린다.

달콤한 봄기운에 짭쪼름한 바다내음으로 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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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진도의 외항에서 내항으로 가는 언덕길에서 본 해수욕장 ⓒ 김은주

20톤이라는데 배는 생각보다 몹시 자그마하다. 파도가 이끄는 대로 흔들리면서 한려해상을 가로지르는 기분은 대단히, 아주, 굉장히 기분 좋다. 달콤한 봄기운에 짭쪼름한 바다 내음이 더해져 제멋대로 가슴을 쿵쾅대게 하는구나. 날씨도 화창하고 맑아서 바다로 쏟아지는 봄 햇살을 맘껏 누린다. 봄볕에 타면 보던 님도 몰라본다는데, 저 봄 햇살을 마다할 수가 없다.

비진도 외항에 내려 언덕길을 올라 내항으로 접어든다. 비진도 해수욕장의 옥빛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대하고 보니 그 수려한 빛깔이 놀랍게 아름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제주 표선 앞바다의 지중해빛 맑은 바다 색깔이나 우도 산호 해수욕장의 놀라운 푸른 빛도 좋지만, 비진도의 옥빛 역시 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산과 바다, 해변이 멋드러지게 이어진 해안선도 일품이다. 이런 다양한 해안선은 남해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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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에 몸을 내맡긴 비진도의 유채 ⓒ 김은주

숨넘어갈 듯 흔들리는 유채꽃에 노랗게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비진도 해수욕장의 옥빛에 가슴 설레는 만큼 모진 바닷바람과 싸우고 있는 여린 풀들의 속살이 더 애잔하다.

천연기념물 63호인 팔손이 자생지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크게 손상되었다는데, 다행히 어린 팔손이들이 새로 자라나고 있어 자생지로서의 면모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거라 하니 다행이다. 기특한 녀석들…….

비진도 바다빛에 취해 한참을 있노라니 반짝이는 바다 앞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늙은 어부가 눈에 들어온다. 2개 마을 280명이 살고 있는 섬 비진도에서 태어나 그곳의 어부로 살고 있는 분이다. 그물깁는 실패를 입에 물고 구멍난 그물을 정성껏 손질하고 있는 늙은 어부의 뒷모습이 짠하다.

작은 섬에서 나고 자라 결국은 그 곳에 몸을 누일 그이의 검은 얼굴 위로 오후의 북서풍이 불어온다. 시간이 하얗게 늙어가는 고요한 섬이다. 한여름 관광철에 다시 온다면 느낌이 또 다르겠지만, 새 봄의 옥빛 비진도는 말갛게 고요한 시간의 우물 속에 잠겨있다 나온 듯한 기분에 잠기게 했다.

뚝뚝 떨어진 하얀색 동백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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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비진도를 떠나 다시 배를 타고 한산도로 옮겨 갔다. 붉은 동백보다 뜰동백나무라는 하얀 동백꽃이 먼저 눈에 띈다.

동백들이 송이째 떨어져 있다. 겹동백이라 그런지 더욱 처연하다. 지지도 않고 바스러지지도 않은 채 뚝뚝 떨어진 꽃송이를 보는 일은 아, 참말이지 언제라도 마음이 아프다. 그런 모습에서 위로받는 때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지만.

붉은 동백잎 두 장을 주워 읽고있던 책갈피에 가만히 꽂아 놓았다. 시간을 붙잡을 순 없어도 동백잎이 말라가는 동안, 이 순간을 기억하고 남길 수는 있으리라. 그러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느티나무 큰 가지가 혀를 끌끌 차는 듯 싶기도 했다. 우람한 줄기라도 새로 나는 연둣빛 이파리는 역시나 여리고 곱구나.

파도가 높아서 외도에 가닿지 못한 관광객들이 몽땅 한산도로 몰려오는 통에 때아닌 사람 무리들로 몹시 어수선해졌다. 저 멀리 바다를 굽어보는 수루에 올라 너무도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시를 새삼스레 읽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몇 해 전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던 때가 선연히 떠올랐다. 무인이 쓴 <난중일기>에는 '오늘은 명령을 듣지 않는 부하 몇의 목을 베었다' 혹은 '도망가는 적들의 목을 얼마나 베었다' '베었다' '베었다' 하는 소리만 잔뜩 적혀 있었는데도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먹먹했더랬다.

위대한 장수, 어울리지 않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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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에서 동백꽃잎을 주웠다 ⓒ 김은주

대단히 호방한 이야기였음에도 문장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이순신이 전쟁을 치렀던 한산도에 이르니 더 선명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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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수루에서 바라본 풍경. 먼 옛날 이순신 장군도 이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 김은주

"나는 말했다. 적의 선두를 부수면서, 물살이 바뀌기를 기다려라. 지휘 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이제 돌아가 쉬어라. 곧 날이 밝는다. 수령들은 돌아갔다. 나는 잠들지 않았다. 임준영의 보고에 따르면, 그날 밤 적은 발진 준비를 끝내고 소, 돼지를 잡아서 병졸들을 먹였다. 적은 말을 베어서 대장선 이물에 말피를 발랐다. 나는 임준영과 그 수하를 안위의 배에 배치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우수영 뒷산에서 피난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연한 바다의 저녁 썰물에 다시 드러나는 갯벌과 거기에 내려앉아 주둥이로 뻘밭을 쑤셔 먹이를 찾는 새들과, 그리고 그 빈 공간으로 밀려드는 빈 시간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빈 공간과 빈 시간 앞에서, 내 허리에 매달린 칼의 허망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했던 외로운 장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수루에서 보이는 섬 저편에 박정희 대통령의 명으로 세웠다는 한산도 대첩비가 우뚝 서 있다. 이순신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방법을 택한 듯 하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통치자 때문에 고생 많으시다 싶어 맘이 안 좋다. 가닿지 못하는 먼 곳에 이용해 먹을 만한 영웅의 이미지만 억지로 만들어 세워놓은 그 시절의 쓸데없는 공명심에 괜히 맘 상한다.

활시위를 당기던 한산정에도 잠시 들렀다. 과녁까지 무려 145미터란다.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놓여 있는데 여기서 활쏘기 연습을 하던 이들이 과녁까지 가 닿게 쏘지 못하면, 저 바다에 뛰어들어 화살을 주워 와야 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바다에 안겨 잠을 자니 꿈이 참 달다

전쟁의 시기가 아니라 평화의 시기에 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한반도의 위태로운 평화는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것이어서 준비하고 결연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곧잘 따라오고는 하지만, 소리없는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때 평화의 시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또한 어불성설이라는 것 또한 잘 알지만, 한산섬 수루에서 반짝이는 저 바다를 고요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준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솟는다.

통영으로 다시 돌아오는 배 위에서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국립공원 101호'를 요람처럼 흔드는 남해의 파도 덕분이다. 바다에 안겨 꾸는 꿈은 아, 한없이 달더라.

덧붙이는 글 |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국립공원인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4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4월 17일부터 국립공원 지역의 도보순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13일까지 8주 동안, 주마다 5일씩 국립공원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제가 참가한 구간은 2주차(4월 23일-4월 25일) 구간 가운데 3일이었습니다. 일반인의 참가 신청도 받고 있지요. 자세한 일정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http://www.knps.or.kr/)에 들어가서 ‘국립공원 40일 도보순례단’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4월 23일의 기록입니다.

덧붙이는 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국립공원인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4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4월 17일부터 국립공원 지역의 도보순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13일까지 8주 동안, 주마다 5일씩 국립공원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제가 참가한 구간은 2주차(4월 23일-4월 25일) 구간 가운데 3일이었습니다. 일반인의 참가 신청도 받고 있지요. 자세한 일정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http://www.knps.or.kr/)에 들어가서 ‘국립공원 40일 도보순례단’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4월 23일의 기록입니다.
#비진도 #국립공원관리공단 #도보순례 #칼의 노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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