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킴

[서평]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KIM)

등록 2007.05.17 18:24수정 2007.05.18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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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한 여류시인에게 한국 문학의 특징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 분의 대답은 다름 아닌 "소박함"이었다.

다소 주관적이긴 하지만 일리 있는 대답 같다. 대개 문학은 국민성이나 민족성을 닮는다고 하니까. 꾸미지 않은 자연미를 추구해 온 우리 민족의 문학에서 소박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문학은 어떨까? 흔히 말하길 독일 문학은 관념적이라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독일인들이 그만큼 관념적이란 의미일 것이다. 잘 알다시피 독일은 칸트, 헤겔, 칼 마르크스, 니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등과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철학 강국이다. 그래서인지 독일 문학은 왠지 모르게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영국 문학은 '이야기(서사 구조)'에 충실한 느낌이다. 예전에 TV에서 영국의 문화산업에 관한 기획 프로그램을 본 적 있는데, 그때 인상 깊었던 것은 세포조직처럼 영국 전역에 퍼져 있다는 소규모 문학회, 이야기 모임이었다. 물론 문학회라면 우리나라에도 많지만 영국의 소규모 문학회의 특징은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즐긴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국인들은 이야기를 즐기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영국 문학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에서 흘러나온 듯한 흥미진진한 이야기(story)들이다.

마르지 않는 샘, 영국인들의 '이야기보따리'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부터 헨리 필딩의 <톰 존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 거기에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영국인들의 이야기보따리는 마르지 않는 샘 같다.

물론 프랑스 문학도 영국 문학 못지않게 뛰어난 입심을 자랑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노틀담의 꼽추>는 말할 것도 없고, 몰리에르,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모파상, 에밀 졸라, 스탕달, 발자크,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 생텍쥐페리, 알퐁스 도데, 플로베르, 알베르 카뮈 등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쟁쟁한 문학가들이 줄을 섰다.

프랑스 문학과 영국 문학 모두 서사 구조가 탁월하다는 점에선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약간 다르다. 독일이나 프랑스 문학이 좀더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고 거대 담론적이라면 영국 문학은 이야기 자체에 충실한 느낌이다. 앞서 소개한 영국의 대표적인 작품들만 하더라도 작은 문학회에서 낭독하거나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들려줘도 좋을 만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글북> 작가 키플링에 대한 엇갈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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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하우스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 역시 영국을 대표하는 타고난 이야기꾼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단순히 <정글북>의 작가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최초의 영어권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명예와 제국주의 신봉자란 오명을 동시에 지닌 특이한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전세계로 팽창하던 19세기(1865). 그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6살까지 살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모는 인도에서 최상층에 속하는 신분이었지만 그는 무려 5년 동안 영국의 한 가정에 양자로 맡겨지는가 하면 수준 낮은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1882년 키플링은 인도로 돌아가 7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어릴 적부터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도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한다. 이를 통해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동양의 사상과 종교에도 시선을 돌려 마침내 그의 대표작 <킴>(KIM)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한 걸작 <킴>에 대한 평가는 찬반으로 엇갈린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인도인을 비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시각으로 읽느냐 인도인의 시각으로 읽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우리 민족을 비하한 작품에 해당하는 셈이다.

독자 시각에 따라 소설 성격 바뀌는 키플링의 <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정글북>과 함께 동화의 범주(카테고리)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동화책 치고는 분량이 너무 많고 주인공이 10대 소년이라는 점만 빼면 차라리 성인들이 읽는 정치나 탐정 소설에 더 가깝지만, 그렇다고 동화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책이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 책에 담긴 사상이 친(親)제국주의적이란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작가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정확히 식별하고 여과해서 읽는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다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은 놓쳐선 안 될 걸작임에 틀림없다. 어른 못지않은 임기응변과 처세술, 깊은 통찰력과 빠른 판단력, 우수한 두뇌를 골고루 갖춘 혼혈아 킴(KIM)과 운명적으로 킴의 스승이 되어 그를 열반의 경지로 이끄는 티벳의 라마승 테슈 라마. 킴의 비범한 재능을 일찍 알아차리고 그를 영국의 첩보원으로 양성하는 '큰 게임'(영국의 인도 식민지배 및 인도 북부 소왕국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게임)의 기획자들. 그리고 식민치하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도인들. 거기에 인도와 티벳의 웅장한 대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며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가 완성된다.

이 작품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한 소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소설이 될 수도, 티벳 라마승이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종교 소설이 될 수도, 인도를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각축전을 벌이는 역사 소설·정치 소설이 될 수도, 주인공 킴의 활약상을 그린 모험 소설·탐정 소설이 될 수도 있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킴'

이 책을 어떤 시각으로 읽을 것인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할 몫이다. 내 경우엔 이번에 <킴>을 처음 읽었는데 중간 중간 눈에 띄는 종교적 잠언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비록 키플링 자신은 "동양과 서양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나는 느낌이다.

<정글북>의 모글리가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면, <킴>의 주인공 킴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그런 의미에서 킴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모색한 키플링의 분신이 아닐까?

"그는 울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서 울어야겠다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너무 쉽게, 바보같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귓속으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자기 존재의 수레바퀴가 외부의 세계와 새롭게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의 눈에 전혀 의미 없어 보이던 사물들이 자신의 크기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길들은 걸어다니는 존재로, 집들은 살아가는 존재로, 가축들은 부리는 존재로, 들판은 경작하는 존재로, 남자와 여자는 대화를 나누는 존재로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실재했으며 참된 것이었다. 그들은 굳건히 땅을 디디고 서 있었다.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맨발에 묻어 있는 그 흙, 바로 그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인생이란 죄가 아니라 단순한 광기라는 것, 내가 말하려는 건 그거요." - 본문 중에서

덧붙이는 글 | 키플링 <킴> 북하우스(2007) 하창수 옮김, 559쪽, 가격 18000원

덧붙이는 글 키플링 <킴> 북하우스(2007) 하창수 옮김, 559쪽, 가격 18000원

킴 (반양장)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하창수 옮김,
문학동네, 2009


#러디어드 키플링 #북하우스 #킴 #정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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