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수고한 일이야

김인숙 장편소설 <봉지>를 읽고

등록 2007.05.21 15:33수정 2007.05.2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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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봉희였던, 그러나 별명인 ‘봉지’로 불렸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봉지>.

여기까지 적고 보니 마치 무슨 성장소설 같다. 성장소설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흔히 생각하는 성장소설의 마지막 결말처럼 ‘그래서 소년(혹은 소녀)는 어른이 되었습니다’로 끝나지는 않는 소설.

봉희가 봉지가 된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깡패가 되고 싶었던 오빠 봉호의 싸움판에 무모하게 뛰어들면서부터다. 훗날 친구가 된 가현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비닐봉지처럼 날아갔다.

그녀가 깨지는 걸 보면서, 가현은 말했다. 어, 저거 찢어졌네. 자전거 체인이 봉지의 이마를 뚫은 것이다. 열일곱 살, 이마를 열두 바늘이나 꿰맸으나 바늘이 기울 수 있었던 것은 찢어진 살뿐이었고, 이미 생겨 버린 구멍을, 그 구멍을 통해 날아가 버린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전까지 어둡고 내성적이었던 봉지는 변했다. 문제아였고, 날라리였고, 불량학생이었던 순미, 영주, 가현과 친구가 되었다. 봉지 역시 문제아, 날라리, 불량학생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소설을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간 것은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야말로 텅 빈 ‘봉지’ 같다고 생각하는 봉지.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봉지의 마음을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읍내만 벗어나면, 서울만 가면, 스무 살만 된다면, 대학생만 된다면…하는 봉지의 마음,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말이다. 나는 사실 봉지가 자라는 1970년대 후반~1980년대 그 시절(이라고 불리는 그야말로 그때 그 시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혹은 태어나서 겨우 걸음마를 걸었을 그 시절을 다룬 소설들을 즐겨 찾아 읽었더랬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고 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라는 물음과 함께 너무도 사랑했지만 사랑의 방법은 몰랐던 그 시대의 연인은 내 마음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 후 이념이나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마음이고 뭐 그런 식의 당연한 말을, 다르지만 결국은 비슷한 빛깔로 얘기하는 여러 소설들을 찾아 읽었던 것이다. 식상하다면서도 계속 찾아 읽고, 다 똑같은 얘기라면서 매번 울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생각하면서도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가엾니, 아파하다가 그렇게 연민을 가지는 스스로에게 분노나 부끄러움 따위의 감정을 느꼈다. 그 소설들을 관통하는 진정성에 마음이 먹먹해지고는 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저토록 아프게 치열하게 순결한 열정을 바치면서 누군가가 사는 동안, 나의 엄마, 엄마는 무얼 했나요? 엄마는 대학생이 아니라서 데모 같은 건 안했나요? 대학생 아니면 데모는 할 수 없었나요? 엄마는 잠시 그때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냥 살았다. 엄마는 그냥 살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냥, 살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놀라서, 소설 속 멋있었던 그들과 다른 엄마의 삶이 당황스러워서, 소설 속 그들의 삶이 전부였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멋쩍어서, 나도 그냥 엄마를 따라 웃었다. 어떻게 그냥 살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던 열여덟 나는 조금 우습게도 지금 어떻게, 그냥,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냥 산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사는 시대와 무관하지 않음을, 엄마 역시 그랬음을 말이다. <봉지>에 나오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냥, 살았다.

나는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으며, 때때로 수배를 당하고, 때때로 도망을 칩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피로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내 순결한 열정을 다 바칠 수 있게 된 것을 고마워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내 생의 모순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건대 쉬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태만해지도 싶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러한 내 욕망이 비난받지 않고, 다만 욕망이 욕망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 301쪽

이 책의 남자주인공인 이진영의 말이다. 이진영은 주인공 봉희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운동권으로 세상을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순결한 열정을 바쳐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아무렇지 않은 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스물두 살 봉지가 그 나이가 되도록 유일하게 꿈꿔온 것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감옥에 가고, 누군가는 몸에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고시 패스를 꿈꾸며, 누군가는 최고의 깡패가 되기를 꿈꾸던, 그녀가 알고 있는 모두가 스무 살의 언저리에 있던 그 시절에, 그녀의 꿈은 기껏 첫사랑뿐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 보잘것없는 꿈은 세계를 연다. 문이 열리고, 이제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찬란한 빛이 문밖의 길을 밝힌다. 그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이 된다. 그녀의 꿈이, 열린 세계의 폭죽을 터뜨린다. - 212쪽

생의 유일한 꿈이 ‘첫사랑’인 봉지의 그 위대하고 특별한 꿈 속에 함께 한 이진영과의 인연은 애틋하고 절절했다. 봉지의 오빠 봉호도, 봉지가 첫사랑인 수호도, 봉지의 친구인 순미, 영주, 가현도, 가짜 대학생 흉내를 냈던 중혁도 모두가 그 시절을 살아냈다. 조금 소박해 보일지라도 중요한 꿈을 가지고, 조금 초라해 보일지라도 아주 소중한 꿈을 가지고 말이다.

언젠가 바람에 날리는 검은 비닐봉지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헬륨 가스를 제 몸에 가득 넣고 가볍게 허공을 날아가는 풍선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딘지 한두 군데 찢어져 있을 것 같고, 젖어 있을 것 같으며,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그런 느낌.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그런 풍경은 외면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마도 그 검은 비닐봉지가 내 모습 같다고 여겨서가 아닐는지.

바람에 속수무책인 스스로를 겨우 견뎌내고 있던 비닐봉지.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디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가난이거나, 처음 의미조차 잊어가고 있지만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 신념이거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이거나,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거나,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는 끈질긴 외로움이거나, 어쩌면 한숨조차 허용하지 않는 무료한 권태일지도.

모습이야 조금 다를지라도 우리는 무언가를 견디며 오늘도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삶일 테니까. 조금 서글퍼진 채로 그러나 미소 지으며 나는 봉지가 되어서, 봉지에게, 말하는 것이다.

수고했다고, 누구에게나 젊음은 설익은 열정이어서 그 생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수고하고 수고한 일이었다고……그러니 모든 생의 모든 시간들은 위대한 것이라고……그것만으로도 너의 아무것도 아닌 삶을 용서하라고……. - 314쪽

지나온 생을 견딘 힘만으로도 남은 생은 괜찮은 법이라고 말이다.

봉지

김인숙 지음,
문학사상사, 2006


#봉지 #김인숙 #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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