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마담에서 쌈닭이 되기까지

[나의 6월 이야기] 내 부끄러운 20년 세월 속엔 다른 이들의 피와 눈물이...

등록 2007.05.29 09:49수정 2007.06.0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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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때 나 거기에 있었다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이한열 열사가 누워있던 그 시절 나 역시 세브란스의 같은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나는 사회에 대해 특별한 의식 없이 냉소적으로 살아가는 서른 한 살의 노처녀로 부모에게 골칫거리인 머리에 바람이 든 유한계급이었다.

특별히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과외로 용돈이나 벌어 프랑스 문화원에 드나들며 알게 된 프랑스 사람들과 영화나 보고 여행이나 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4월 5일에 프랑스 사람들과 강화도 여행 중 승용차에 치어 다리 두 군데 골절상을 입고는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6인실 일반병동에 입원 중일 때였다.

내가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는 연일 연좌농성과 데모가 벌어졌다. 6인실이던 같은 병실에 이대 사회학과 학생이 데모 중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입원해 있었다.

의사들은 젊은 그 여학생에게 관심이 많아 서로 깁스를 해주려고 난리였다. 그러는 한편 "계집애가 공부나 하지 무슨 데모를 한다고 난리냐?"는 거친 소리도 거침없이 내뱉곤 했다.

어쨌거나 이한열 열사가 누워있던 병동의 두 층 아래에 내가 있었던 관계로 병동 앞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며 연일 연좌농성이 벌어졌고 전경들은 걸핏하면 출입을 제한하고 문을 닫아걸고 최루탄을 쏘아대 환자들과 보호자뿐만이 아니라 병문안을 왔던 이들의 불평을 샀다.

병문안을 왔다가 발목을 잡힌 이들은 연좌농성을 하는 사람들을 원망했고, 병문안을 핑계로 드나드는 남동생을 염려하던 나의 부모님은 혹시라도 남동생이 데모대에 합류할까봐 늘 전전긍긍하며“너만은 절대 쓸데없는 데모에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 섞인 당부를 하곤 했다.

당시 막내 동생은 이한열 열사와 같은 2학년으로 고려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동생은 내 병문안을 핑계로 병원에 들를 때마다 학생증과 회수권 등을 슬그머니 빼놓고는 한참 후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가득 풍기며 들어와 잠시 기다리다가 병원 문이 열리면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뭐 했느냐고 물으면 씨익 웃던 동생에게 동조도 비난도 아닌 무관심의 눈길을 보내며 사고 당한 내 처지만 원망하고 있었으니 세상을 너무나 몰랐던 것일까?

사회변혁을 꿈꾸는 이들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나 무관심과 냉소로 내 앞의 생을 꾸려가기에 급급했던 날들. 부끄럽지만 나는 뜨거웠던 6월의 거기 바로 그 자리에 방관자의 한 명으로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병동에 누워있었다.

Ⅱ.유한마담에서 쌈닭으로

2년간의 병원 생활이 너무 지겨웠던 나는 89년 별 생각 없이 도피성 결혼을 감행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사회에 대해 특별한 의식 없이 이루어진 나의 무모한 결혼에 실패는 당연히 예정된 순서였다.

소위 ‘노가다’였던 남편은 광주 공사가 끝나자 실업자가 되어 무허가 판잣집들이 널려 있는 시어머니의 판잣집으로 나와 아이를 끌어들였다. 나는 거기 들어가 살면서 가져 온 내 짐들을 몇 년씩 풀지도 못하고 살았다. 만혼이라 한약까지 먹어가며 낳은 아이는 빈곤한 생활에 오히려 짐만 되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사는 게 바로 지옥이었다.

혼자일 때 과외로 벌어 쓰던 돈의 1/10인 월 8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던 때는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2년간의 실업자 생활로 취사용 가스마저 사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해져 용돈을 벌어 쓰기 위한 것이 아닌, 생계에 목을 맨 처절한 생활이 이어졌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나의 몫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바로 나 자신의 일이 되어, 사사건건 내 삶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장 일을 해야 했지만 과외 외에는 사회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데다, 전문 기술도 없고 어린 아이가 딸렸으며 약간의 지체 장애까지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을 다 지닌 셈이라 그저 단순 부업이나 판매, 몸으로 때우는 일이 내가 찾을 수 있는 일의 거의 전부였다. 결혼 전처럼 과외를 하고 싶었지만 결혼 후 지방에 내려가 사느라 연고마저 다 떨어져 나간 후여서 그마저 쉽지 않았다.

그 때는 미싱 기술자, 미용 기술자, 심지어 길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실밥을 뜯는 이들마저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기에 나는 너무 배가 고팠고 지쳐 있었다.

한개 2원짜리 라디오 부속품 부업, 길거리 무가지 신문 돌리기, 파출부, 베이비시터, 보험설계사, 학원 강사 등 온갖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나는 어느새 삶의 현장에서 걸핏하면 목소리를 높이는 쌈닭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 스스로 싸우며 챙기지 않는 한 나의 것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깨닫게 됐다. 스스로 권리를 찾아 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내 권리를 찾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혼이 계기가 되어 나는 끔찍한 경제적 고통, 가난의 대물림, 그것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 내팽개쳐진 수많은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었다. 노예로 교육받은 자가 자유를 꿈꾸기 위한 대가치고 인생 절반의 투자는 상당히 값비싼 셈이지만, 어쩌면 평생을 노예로 살 수도 있었는데 인생의 절반은 자유를 꿈꿀 수 있다는 사실로 내 인생 절반의 실패를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2002년과 2003년 잠시 여성신문사에 다닌 것을 계기로 여성운동 하는 선배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연대감을 형성하며 정신적,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팀장으로부터 혹은 고용주로부터 “아줌마, 내일부터 당장 일을 그만둬!”라는 이유 없는 해고 통고를 받을 수도 있는 비정규직 아줌마 노동자일 뿐이다. 그것이 내가 비록 힘없는 노동자지만 자본과 기득권의 노예로 길들여진 나의 의식으로부터 탈의식화와 실천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이 될 그날을 꿈꾸며 쌈닭의 길을 가고 있는 이유다.

배부른 돼지, 부당한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가 아닌 자유인 노동자로 사람답게 살 그날을 위하여!

덧붙이는 글 | '나의 6월 이야기' 공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나의 6월 이야기' 공모글입니다.
#이한열 #연좌농성 #데모 #권리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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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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