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에 '꽃향수 산책길'이 있다

선릉 쥐똥나무 꽃향기의 유혹

등록 2007.06.07 12:06수정 2007.06.0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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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서울 강남 선릉역에서 내려 주변을 걷자니 도심 어디선가 꽃향기가 흘러온다. 6월의 싱그러움이 펼쳐지지만 사방에 빌딩이 서 있는 도시에서 꽃향기라니! 지나가는 어느 여인이 흘린 향수 내음인가?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며 근원지를 찾지만 맡아질 듯 말 듯 애를 태우며 슬며시 흘러오는 향.

마치 요염한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듯 달콤하며 깊은 유혹의 냄새다. 아카시 꽃의 향과 비슷하지만 아카시 꽃향기가 청순한 소녀의 달콤한 향기라면 그보다는 더 성숙하고 농염한 여인의 향이며 짙은 화장처럼 천박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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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담장을 따라 피어있는 쥐똥나무 꽃. ⓒ 한성희

꽃향기를 따라 취하듯 따라가자 선릉이 나타난다. 꽃향기는 점점 더 짙어진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삼릉공원(선·정릉) 담장을 따라 하얗게 피어난 꽃무리들이다. 이 향기의 근원은 이 쥐똥나무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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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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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흠흠, 이 향기. 아, 너무 좋다…."

선릉 쥐똥나무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돈다. 담장을 훌쩍 넘어 짙게 풍기는 향수의 길이다. 점심시간에 몰려나온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다. 짙은 꽃향이 풍기는 길이 이렇게 도시 한복판에 펼쳐져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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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쥐똥나무는 근래 생울타리로 많이 심어 보기 드문 꽃은 아니다. 길을 가다 생울타리에 하얗게 피어난 작은 꽃이 풍기는 유혹에 못 이겨 코를 대고 맡아 본 경험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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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청순한 작은 흰꽃이 피는 이 나무에 쥐똥나무라는 우스운 이름이 붙은 이유는 열매가 쥐똥을 닮아서란다. 선릉의 쥐똥나무 꽃에는 꽃향기를 찾아온 벌들이 윙윙거리며 꿀을 빨기 바쁘다. 작은 꽃에 꿀이 이리 많다니. 담장 옆에 세워둔 오토바이 안장에도 쥐똥나무 꿀과 꽃가루가 떨어져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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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25년이 넘은 선릉 쥐똥나무 군락이 담장을 따라 펼쳐지고 꽃 향기가 진동한다. ⓒ 한성희

선릉 쥐똥나무는 키가 3m는 넘게 훌쩍 크고 나무 굵기가 남자 어른 팔뚝보다 더 굵은 나무들로 군락을 이룬다. 담장을 따라 걸어가며 꽃향기에 취하는 동안 어느 새 약 600m 향기의 길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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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지집고 나온 쥐똥나무 꽃가지들. ⓒ 한성희

되돌아오던 길에 마주 오던 서너 명의 양복 입은 남자들과 마주쳤다. 그 중 40대 초반쯤 되는 뚱뚱한 남자가 쥐고 있는 쥐똥나무 꽃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넥타이를 매고 팔자걸음으로 당당하고 활기차게 걷는 듬직한 남자와 손에 쥐어진 작은 꽃가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순간, 푸웃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나무를 꺾었지만 왠지 밉지 않다. 꽃향기에 이끌려 담을 비집고 나온 저 작은 꽃가지를 꺾었으리라. 사무실에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들어온 여직원들에게 향기를 맡아보라고 내미는 모습이 보인다.

천천히 걸으면 7~8분 거리이고 향기를 맡으며 벌을 구경하고 걷는다면 15분도 부족한 산책길이다. 고층빌딩이 빽빽한 강남에서 이런 꽃향기 산책길이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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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고요한 산책로가 마술처럼 숨어 있다. ⓒ 한성희

선·정릉을 들어가면 푸른 소나무와 숲이 도시를 막아준다. 이 짙은 녹음의 숲에 도심의 보물을 음미하고자 여인들과 관람객들이 제법 많이 들어온다. 선릉 재실에서 정릉 산책로를 따라 다시 쥐똥나무가 빽빽한 길을 따라 걷는다. 꽃향기가 숨 막히게 따라온다.

왕릉 특유의 기품 있는 소나무 숲에 흙길이 펼쳐져 있다. 도시의 탁한 자동차 매연과 후끈 달아오른 콘크리트에 뒤덮인 숨 막힌 길에서 벗어서 흙을 밟자 숨이 트인다. 고혹적인 꽃향기가 더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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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꽃 사이에 보이는 소나무 숲이 싱그럽다. ⓒ 한성희

선릉 쥐똥나무는 25년 수령의 큰 나무들이다. 이렇게 오랜 연륜을 가진 쥐똥나무 군락지는 서울에서 이곳 말고는 보기 힘들다. 요즘 한창 향기를 뿜는 이 꽃들의 향연을 보려면 점심시간에 잠시 도시락을 들고 이곳에 가면 된다. 선릉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유혹적인 여인의 향기 속에 푹 빠져보는 것도 작은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쥐똥나무 산책길을 걷다가 꽃향기가 유혹을 해도 섣불리 주저앉거나 너무 헤프게 해실해실 웃지 말고 꾹 참아야 한다. 이런 시가 있으니.

쥐똥나무가
쥐똥나무일 때를
제대로 읽기 위하여서는
섣불리 쥐똥나무꽃 향기에 주저앉지 말고
적어도 11월까지는 금의 침묵을 꽉 문 채로
너무 헤프게 웃지 않는 것이 좋다

- 한영옥 <正名> 일부
#선릉 #쥐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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