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뭐 내께 있나? 있으면 있는 대로..."

도황리 연포에서 만난 박정금 할머니

등록 2007.06.21 17:23수정 2007.06.2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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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근흥면 옛 길을 더듬어 지나던 중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았다. 여기저기 경로당, 노인정마다 효도잔치가 열리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효도관광을 기획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노인은 외롭고 쓸쓸하다.

어쩌면 그들이 맞이하는 고독은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존재들이 겪게 되는 필연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때, 그들의 존재를 우리 안에 보듬을 때만이 현재 우리 삶의 의미와 미래에 우리 아이들의 삶의 풍요가 가능할 것이다.

태안의 옛길은 안흥 내항에서 시작해 안흥성을 지나 정죽리 옛 돌삼재 마을(돌에서 샘물이 나왔다 해서 돌샘재(石井峴), 이후 돌삼재라 이름 붙여졌다) 자리에서 끊긴다. 1979년 대전에 본부를 둔 국방과학연구소가 종합시험장을 이곳에 만들면서 돌삼재 마을 전체가 수용되어 일반인의 출입통제구역이 된 까닭이다.

종합시험장 정문 초소의 군인들은 기자의 카메라를 보고 예민해진 탓인지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며 ‘태안의 옛길’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공문’, ‘지시’, ‘허가’와 같은 정나미 떨어지는 말들만 되풀이한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603번 도로를 따라 연포삼거리까지 달렸다. 여기서 오른 편으로 돌아 연포해수욕장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황골 마을로 빠지는 길, 차 한 대 간신히 다닐만한 비포장 흙길만이 옛길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흑백사진 같은 비수기의 해수욕장

비수기의 해수욕장 풍경은 낯설다. 그런데 이 낯설음은 흑백사진처럼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낯설음이다. 금방이라도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덕분에 연포해수욕장 초입에 있는 주차장의 빈자리는 더 넓어보였다. 해변까지는 불과 50여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 횟집과 민박집, 모텔들이 정갈하게 나뉘어 해변을 에워싸고 있는 해수욕장 주변 골목 역시 인적이 드물다.

고작해야 한 철 밀려왔다 밀려가는 행락객들을 위해 이것저것 마련했던 시설들이 잠시 쓸모를 잃은 채, 다시 쓰일 날을 기다리며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여름날의 해변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곳이지만 이 한때를 제외하면 바다는 언제나 추억을 회상하거나 무언가를 잊기 위해 찾는 이들을 묵묵히 맞아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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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연포해수욕장. 비수기의 해수욕장 풍경은 낯설다. ⓒ 강곤

우리나라에서 난류가 마지막으로 돌아나가는 곳이기에 동백나무가 울창하고 늦여름까지 바닷물이 따뜻하다는 연포해수욕장은 1971년 중앙일보 사(社)가 종합레저타운으로 개발하면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면도나 만리포만큼은 아니어도 아직도 한창 때는 연포삼거리까지 차들이 줄을 서는 곳이니만큼 가게들은 큼직큼직하고 지금도 문을 연 집이 서너 곳이나 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편의점 주인아줌마는 전화통화를 하느라 손짓으로 물건을 팔고, 맞은 편 가게에서는 동네 할머니들의 화투판이 벌어졌다. 해변이 다 내다 뵈는 횟집들은 평일이라 손님도 없고, 어느 식당에서는 방금 상을 치르고 왔는지 상복 차림의 식구들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런 낯선 풍경들 사이에서 연포해수욕장 번영회장을 맡고 있는 가재희씨의 소개로 만난 이가 박정금 할머니다.

“살아온 게 고약해서…”

찾아간 집 대문에는 문패가 없었다. 짐작이지만 이 집이 할머니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지 싶다. 할머니는 바닷물이 빠져 드러난 갯벌에서 조개를 캐와 손질을 하고 있었다. 적게 잡히면 반찬으로 먹고, 많이 잡히면 팔기도 한다는 조개는 오늘 꽤 잡힌 셈이라고, 한 5천원 어치 쯤 될 거란다.

할머니가 직접 조개를 팔러 다니지는 않는다. 이미 여든을 넘긴, 동네에서 가장 연로한 축에 드는 자신이 직접 팔러 다닌다면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염려 탓이다. 그래서 조개를 사려는 사람들이 할머니 집을 찾는다. 전화로 조개가 있냐고 물어보고 있다고, 가져다준다고 해도 사람들이 직접 가지러 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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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황리 연포에서 만난 박정금 할머니 ⓒ 강곤

이런 이야기 가운데서 할머니는 연신 사는 게 부끄럽다고 한다. “살아온 게 고약해서…”라는 할머니의 말 속에는 삶의 고단함과 함께 회한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수시로 이 말이 튀어나왔고 지나온 날을 들춰볼라치면 간신히 엿보였던 그이의 삶이 이 말로 다시 덮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오가는 말들은 툭툭 끊겼고 기자에게는 별다른 묘수가 없었다. 죽치고 앉아 할머니가 타주는 커피를 거푸 마시고 넉살좋게 넙죽 저녁밥도 얻어 먹는 수밖에.

할머니는 지금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보조금 15만원과 딸네, 아들네에서 오는 얼마간의 용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면사무소에서 약간의 쌀과 생필품이 지원되기도 하지만 살고 있는 집 월세 10만원을 내면 빠듯한 살림이다.

그래서 무료함도 달래고 담배 값이라도 벌 겸 날이 좋으면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캐고 궂은 날에는 갓꽃이 흐드러지게 핀 대문 밖 텃밭에서 시금치를 돌보는 것이 요즘 할머니의 소일거리다.

형편이 예전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시집 와서 남들 보리밥 먹을 때 쌀밥 먹던” 시절, 할머니는 베풀며 살기도 했다. 30여 년 전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삼남매인 자식들과 몇 년간의 서울살이도 했다.

다시 내려와서는 서울 효자동에 번듯한 한옥을 옮겨와 오붓하게 두 분만의 생활을 즐기던 시절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만 해도 “살 집에다 논도 열 마지기 정도 있었고, 산도 조금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8년 전쯤인가 막둥이 아들이 사업에 크게 실패하면서 논밭은 물론 살던 집도 날아가고 할머니는 갈 곳이 없어 마을회관에서 1년 정도 머문 뒤에야 지금 집으로 옮겨 앉게 된 것이다.

신랑이 뭔지도 몰랐던 열여섯 새색시

저녁 밥상을 물리고 다시 마주앉았다. 이번에는 버르장머리 없이 맞담배를 물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일체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도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워낙 비위가 약해서. 한번은 치과에 갔는디 입을 벌리면 웩, 벌리면 웩. 하도 그러니께 의사가 아이구 안 되겠다고, 담배 한 대 피면 괜찮을 거 같다 하니께 피우라잖여. 의사가 담배를 피라구 말이여. (웃음) 원체 비위가 약한디 누가 비위 약한데 좋다케서 담배를 피기 시작했지. 술도 하도 멀미가 심혀서 서울에 아이들 보러 가자문 죽겠는 거여. 누가 술 한 잔 하면 낫다길래 차타기 전에 한 모금 하니 좀 낫더만.”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 오르고 그 사이로 끊길 듯 끊길 듯 할머니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해방을 한 해 앞두고 할머니는 도황리 2구에서 1구로 시집을 왔다. 물론 사진도 맞선도 없던 때여서 시집을 오면서나 처음 할아버지 얼굴을 봤다고 한다. 그때 나이 열여섯. 할머니 말마따나 “신랑이 뭔지도 모를 나이”였고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스물 여섯의 파릇한 노총각이었다.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들 형제는 어렵게 크고 그랬어. 왜 죽었는지도 몰러. 병인디 무슨 병인지…. 부모도 없으니께 나이 들은 사람에게 시집가야 고생을 덜 한다구 집안에서 결혼을 시켰지. 시집오니까 남들이 다 재취냐고 물어봐쌌데. 영감은 왜 그때까지 장가를 안 갔을까? 그걸 못 물어봤네.

왜 그때까지 안 했느냐구 죽을 때까정 못 물어봤네요. (웃음) 영감이 양아들이었거든. 시부모님이 자식이 없었어요. 조카를 양아들로 삼았는데 그 조카도 죽고. 결국 환갑이 넘어서 당질을 다시 양아들로 삼은 거지. 그러니께 환갑도 넘은 양시아버지, 시어머니인데 누가 딸 자슥 시집을 보내구 싶었겠수. 아마 그래서 늦지 않았나 몰러.”

열여섯 색시는 환갑이 넘은 시부모 아래서 살림을 배웠다. 또래 중에는 학교에 다니는 이들도 있었지만 부러울 새도 없었다고 한다.

“시집살이야 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왔는디 가르치느라고 시부모님들이 고생혔지. 9월인가 시집을 왔는디 12월인가 우리 할아버지가 그만 징용에 가데요. 그때는 결혼해도 얘가 있어도 다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지.”

다행히 이듬해 해방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건강하게 돌아왔지만 헤어짐은 이후에도 되풀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하는 일이 목수였기 때문에 전국을 돌며 집 한 채가 지어지면 그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가 일이 생기면 곧 다시 집을 나섰다. 큰 딸이 두 살이 되던 무렵에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부모님을 남기고 피난길을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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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 담장 안 한편에 핀 꽃이 좁은 마당을 환하게 하고 있다. ⓒ 강곤

“밥 해먹구 농사짓구, 부모님 모시구 일하느라 그리울 틈이나 있었나 몰러. 하도 옛 일이라 다 잊어묵었지.”

그리움과 평생을 같이 한 삶

스물을 넘겨 딸 둘을 낳고 서른여덟에 늦둥이로 아들을 얻었다.

“그때만 혀도 여자 얘들은 공부를 잘 안 시켰어요. 남들이 그냥 어미랑 집에서 밥 해먹구 일하구 그러지 뭔 공부여, 하고 흉을 보는데도 다 공부를 시켰지.”

할머니는 아이들을 서울에서 학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시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서울 신길동으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서울 생활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영감님이 서울에서 영 못 살더라구. 나는 그냥 살았으면 했는디, 목수일 하던 클럽이 여그 있구 그러니 서울에서 일을 붙들들 못하데요. 그러니 자꾸 여그로 내려오는 거여.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내려왔지. 그때 아이들은 서울에 놓고 내려왔어. 딸들은 다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께.

그때 막내가 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디 누나들한테 놓고 왔지. 말은 안 했지만 부모 떨어지기가 싫었겄지. 그때 신길동에 집을 사려구 했어요. 그 집을 샀으면 좀 나았을 텐데. 칠십 몇 년도인가 김신조가 내려오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제 전쟁 난다구 막 그러지 않아? 그래서 집 안사고 내려왔는디 그게 후회스럽네.”

세 살 터울인 큰딸과 둘째딸은 3년 간격으로 결혼을 했다.

“큰 사위가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는데 얘 둘을 낳구 어쩌다 사우디에 갔어. 그때가 칠십 몇 년도쯤 됐는디, 사진이 있어? 전화통화를 할 수 있어? 편지도 무게를 달아 보내구 그래서 얇은 종이에 써보내구 했는디 얘들이 보고 싶어서 손을 그려 보내라, 발을 그려 보내라….

그러더니 돌아와서는 큰 아이 군대를 보내놓고는 먹구 살려구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 벌써 20년이 가까운데 오지도 가지도 못하네. 둘째딸은 평택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지금 수원 살어. 몇 해 전에 작은 사위가 암으로 죽었어. 그래서 작은 딸이 자꾸 와서 같이 살자구 하는디 나는 여그를 떠나기 싫지.”

벌써 장가를 들어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는 큰 외손주는 여름 휴가철이면 연포를 찾는다고 한다. 할머니는 큰 딸네 이야기를 하는 동안이면 유난히 그리움을 내비쳤다. 당신과 비슷하게 홀로 떨어져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안쓰러움일까, 삶의 고단함을 털어놓고 싶은 이에 대한 그리움일까.

“나는 얘들을 만나면 반갑다고 손 붙잡구 끌어안구 그러들 못혀. 반갑고 이쁘지. 내 자슥인디 왜 안 그렇컸어. 그런데 그게 잘 안되데.”

삶은 오래 지속된다

슬며시 이야기를 돌려 할아버지는 안 보고 싶으냐고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을 던졌다.

“승질이 불같은 양반이었어요. 젊어서 바람을 많이 피워서 별로 보구 싶지도 않아. (웃음) 뭐 밉지도 않구. 넘들 질투 한다는데 그것도 젊었응께, 살아있으니께 하는 것이지…. 맨 날 집 지러 다닌다구 돌아다니구. 왔다 또 딴 디 가구, 딴 디 가구, 그러니 얼굴 볼 시간두 없는디 싸울 시간이 어디 있었간디. 그때야 속이 많이 상했지. 한번은 일 갔다가 아예 각시를 데리고 왔는디 친구들이 집으러 구경을 왔더라구. 나는 속상해서 방안에 앉아있는데 밖에서 그러는 거 보니께 더 속이 상하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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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함도 달래면서 담배 값이라도 벌려고 날이 좋으면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캐고 궂은 날에는 갓꽃이 흐드러지게 핀 대문 밖 텃밭에서 시금치나 돌보는 것이 할머니의 소일거리다. ⓒ 강곤

어느새 창문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잠자리까지 청할 염치는 없어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드문드문 내비치기는 했지만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할머니는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노래방 한다, 호프집 한다, 그러다가 잘 안됐겠지. 일 저지른 뒤에 물어본들 뭣 하구, 물어본다구 일러는 주겠우? 그러구 만 거지. 저도 한다구 하면서 돈 더 벌려구 욕심 피다 그랬겠지. 못 살아야겠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잘 살아보겠다구 그러다 그런 거겠지. 나 이거 털어먹구 말겠다,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저도 장가가서 자식도 있고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 아들이 혹여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전에 없이 목청을 높인다.

“내 언제 동네 사람들 욕할까봐 여그 나다니지 마라 했는디, 내가 어매한테 잘못한 건 있어도 동네사람들에게 잘못한 거 없다, 내가 도적질을 했냐? 강도질을 했냐? 그 이야기두 맞지.”

기자도 맞장구를 쳤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얼추 짚어보면 아들이 사업에 실패했던 시기가 90년대 후반 IMF 사태 무렵이니 무수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생계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며 거리로 바닥으로 내몰리던 때였다. OECD 가입국이니 세계 10대 무역대국이니 하는 허망한 말 속에 놓인 우리네 살림살이가 이다지 위태롭고 불안한 것을 어찌 누구 한 사람만의 탓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프다고 드러누워 있으면 물 한 모금 떠다 줄 사람 없는데 자다가 죽어야지. 이제 끝냈으면 좋겠는 디 그기 안 돼 가지구…. 딸네, 아들네가 같이 살자는데 여그는 못 떠나. 논에서 죽으면 논임자가 치우고 밭에서 죽으면 밭임자가 치우겄지. 그리니 일체 걱정할 것 없다 그러지.”

할머니의 말마따나 삶은 끝이 있고 누구나 그 끝을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다만 우리사회의 미숙함과 무신경함이 삶의 끝자락에 놓인 이들을 더욱 외롭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문을 열고 나오니 뜬금없이 찾아와 옛 일을 온통 헤집은 탓에 오늘 밤 할머니의 잠자리가 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발걸음이 무겁다. 가게에서 담배 한 보루를 사들고 대문 앞에 다시 서니 이건 또 병 다음에 들이미는 약 같아 또 면목이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길 건너 할아버지가 서울 효자동에서 옮겨다 손수 지었다는 그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원래 내 것이 아니니께 그런 거지. 누구 원망하구 할 것도 없어. 다 욕심이야. 세상에 뭐 내께 있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는 게지” 하는 할머니의 마음 속 풍경 가운데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우리 삶의 역사이자 일부인 독거노인들

한국사회가 빠르게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박정금 할머니와 같은 연고가 있는 독거노인 이전에 연고도 없으며 치매나 중풍 등 거동까지 불편한 무의탁 독거노인들에 대해 사회의 보살핌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를 점차 확대시켜 가는 방향이 합리적이고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고와 무연고로, 소득 기준을 통해 최하위계층과 차상위계층으로 나누는 가운데에서 사회복지의 치명적인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연고를 이유로 ‘가족’에게만 떠넘기고 그 책임을 돌리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태안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은 전체 인구의 18.1%로 벌써 만 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그 중에서 혼자 거주하고 있는 노인 수는 3월말을 기준으로 18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태안군은 추산하고 있다.

태안군은 오는 6월부터는 18명의 독거노인 생활지도사를 두어 독거노인의 생활을 보살필 예정이다. 그동안 방치되다시피 해온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늦게나마 갖추는 모양새다.

하지만 잠깐만 계산을 해봐도 1명당 100명씩의 독거노인을 맡아야 하는 생활지도사가 독거노인의 생활불편을 덜고 안전한 노후를 꾸리는 데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기에 이러한 정부의 시책이 말만 번듯한 전시행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노력, 지역 공동체의 관심과 유기적 협력이 함께해야 할 것이다.

우선 독거노인들을 늙고 병들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 밖의 ‘그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했고 우리를 키워냈던 우리 ‘역사’이자 일부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의 고향, 연포해수욕장
영화 '바보선언'의 무대

ⓒ강곤
연포해수욕장은 영화 '바보선언'의 무대이기도 하다. 70년대 말 <별들의 고향>으로 최고의 흥행감독이 되었고 8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이장호 감독의 1983년 작품 <바보선언>.

영화에서 연포는 도시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절름발이 넝마주의 똥칠(김명곤. 현 문화부장관), 트럭운전사 뚱보 육덕(이희성), 가짜 여대생인 창녀 혜영(이보희)이 ‘3인조’가 돼서 무작정 바다로 향하면서 등장한다.

연포해수욕장은 이들에게 일시적이나마 해방구가 되어주며 세 사람은 이곳에서 소외된 자들끼리의 연대의식을 느낀다.

연포해수욕장은 지난 200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하는 ‘영화의 고향을 찾아서’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 현재 그 기념비가 해변 한 가운데 세워져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태안의 새 신문 <태안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태안의 새 신문 <태안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안 #고령화 #노인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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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에 관심이 많다. 함께 쓴 책으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여기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재난을 묻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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