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하루 아침에, 혼자 힘으로 세워지지 않았다

<로마인이야기> 서평

등록 2007.06.30 12:05수정 2007.06.3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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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가 E.H.Carr는 말했다. 역사를 아는 데에는 과거의 사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각도 중요함을 가리킨 말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데에도 과거와의 대화가 큰 역할을 차지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늘날 사화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할 때 역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대의 중요한 사회현상 중 하나인 세계화를 이해하는 데 앞서, 고대 사회에서 세계화를 이루었던 로마제국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으며, 21세기에 들어 이러한 세계화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터넷 혁명은 각국의 재화, 서비스, 자본시장의 개방을 더욱 촉진하여 세계를 단일 생활권으로 묶고 있다. 민족국가의 단위를 넘어 지구촌(global village)을 당위로 하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FTA는 두 나라간의 시장 개방을 목적으로 하는 협약이다. 우리나라는 칠레와의 FTA를 시작으로 현재에는 미국, 중국 등 여러 나라와 협약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세계화와 함께 전개되고 있는 또 하나의 흐름은 지역주의의 확산이다.

지역주의는 EU가 대표적인 것으로, 인접 지역 간의 경제블록을 형성하는 것이다. EU는 상품, 자본, 인력, 서비스의 이동과 유통이 자유로워지고 있고 유로화라는 공통화폐도 사용한다. 세계화 시대 국가들은 경제 통합체를 이루고 있고 나아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는 다른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빈부격차 문제이다. 세계화 시대는 동시에 정보화 사회이자 지식기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정보와 창조적 지식 및 기술이 모든 경제 활동이 핵심이 되어 개인과 기업 경쟁력뿐만 아니라 정부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아프리카를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정보화 사회가 가져다주는 부의 확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정보격차 만큼 소득 격차가 생기고 있고, 정보화 흐름에서 낙오되면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국가 간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층간 도시와 농촌간에도 나타나고 있어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추세에서 일부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세계화가 경제통합에서 시작해서 생활권의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듯이 로마제국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커다란 공동체를 형상하였다. 로마는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그것을 현실화해서 팍스로마나를 이루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서 다른 국가들을 로마의 제국 아래 포섭했지만, 일관된 정책으로 경체 통합체를 완성했다.

우선, 로마는 밀을 생산하지 않았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자급자족을 포기한 것이다. 카르타고에서 양도받은 시칠리아 섬의 밀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섬은 밀의 공급처가 되었고 본국은 올리브와 포도로 업종을 전환하게 되었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 실현된 것이다.

그 이후로 아프리카 북부와 이집트가 로마 제국으로 들어옴에 따라 중요한 밀 공급처가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본국의 식량 공급뿐만 아니라 지역 경기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관된 조세 정책을 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비한 것으로, 속주민은 안전보장비 10%를 낸다.

로마 시민은 노예해방세 5%와 상속세5%를 낼 의무가 있다. 간접세는 모두에게 부과되는 것인데, 본국과 속주의 경제형편을 고려해 관세를 1.5~5%로 부과하고 매상세1%를 걷었다. 로마의 식량정책과 조세정책은 속주와 본국을 긴밀히 연결한다. 속주가 없이는 본국의 식량을 확보할 수 없다. 속주에서 낸 세금은 로마의 방위선을 지키는 데에 쓰인다.

로마가 이룩한 제국은 1천년 정도 지속되었다. 로마에는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스와 유대는 잦은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 사회가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정시대에 태어난 그리스 사람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패배자까지 동화시키는 관용정신’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오늘날의 실정에 맞게 고치면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의 관용정신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드러난다.

첫째, 로마는 속주 자치와 종교를 인정했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신을 모두 인정했다. 심지어 유대인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고 유일신을 섬기는 것조차도 허용했다. 그리고 생활습관이 다른 사람에게도 관용정신을 가졌다.

둘째, 로마사회의 개방적 성격은 인재등용 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차별하지 않고 문호도 닫지 않았다. 우선 속주민들을 등용했다. 카이사르 때부터 로마군 요직에 갈리아 인이 등용되었다. 속주총독도 배출 되었으며 클라디우스 황제 이후 원로원 의석도 개방했다.

로마의 주력인 군단병을 지원하는 보조부대에 우수한 속주 출신이 앞 다투어 지원했다. 과거의 적이 로마에 동화외어 로마 시인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피로를 보이기 시작한 제국은 새로운 활력을 다시 찾았다.

식민 도시 출신인 세네카와 부루스는 클라디우스의 아들 도미티우스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다. 이 역할은 황제 교육을 시키고 훗날 보좌관을 맡는 중대한 것이다. 즉, 로마제국은 본국이 속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속주를 끌어안는 운명 공동체였다. 속주민뿐만 아니라 해방노예의 다음 세대에게 공직의 문을 열어놓았다.

해방노예는 카이사르 이후 로마사회의 중류와 하류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어왔다. 해방노예 등용은 로마의 전통이 되었고, 원로원과 기사계급도 해방노예의 후손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셋째,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로마는 각 정복지여 맞추어 다른 전략 즉, ‘case by case'를 사용했다. 바비타족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민족인데, 로마는 이들을 속주로 삼지 않고 다시 동맹관계를 맺었다. 카이사르 때,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는 대신 로마는 이들의 독립을 인정해 주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협약을 맺었었다.

오랫동안 왕정이 실시된 이집트에 있어서는 총독을 파견하는 대신 황제의 개인 사유지로 삼아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로마화가 된 지 오래되고 경제가 안정된 지역은 원로원 속주, 그렇지 않은 지역은 황제 속주로 삼은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경제적 통합체로서 운명 공동체로서 로마가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로마 사회의 개방성에 있었다. 로마 제국을 이루는 데 가장 우선시 된 원리는 관용정신이었다. 잘못이 있더라도 용서하고 자이가 있더라도 받아들이고 끌어안는다. 이러한 정신과 정책은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을 번영으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다.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지금보다 앞선 로마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바로 ‘관용정신’이다. 낙후된 국가, 계층, 지역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이 공동체로서 함께 잘 살수 있도록 정보격차와 소득격차를 줄일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원은 일방적이고 소모적인 형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뜨거운 피를 공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관용정신은 나와 다른 사람, 민족을 대할 때 필요하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고 한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지도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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