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머니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

달내일기(110) - 베푸는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고승의 모습을 보다

등록 2007.07.14 13:25수정 2007.07.14 15:0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말 한마디마다 따스함이 배인 달내마을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시고 있다. ⓒ 정판수

어제 밀린 일 처리하느라 늦게 잔데다가 오늘 직장에 가지 않아도 돼 늦게까지 이불 속에 들어 있으려는데 밖에서 개가 자꾸만 짖어댔다. 이맘 때쯤이면 녀석들에게 변 볼 기회를 주러 밭 저쪽에 옮겨줘야 했기에 그러는가 하여 밖을 보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야 하는 법.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어 깨어나 보니 아직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태풍의 영향으로 계속 비 내리는 걸 깨달았지만 적당히 내리는 비는 몰라도 줄기차게 오는 비는 역시 싫어 어떻게 할까 하다가 피해는 없는지 주변을 살펴봐야 했기에 문을 열었다.

a

봄날 애써 뜯은 산나물을 할머니가 몰래 갖다 놓다. ⓒ 정판수

그런데 …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제법 실하게 묶인 열무 두 단이 놓여있는 게 아닌가. 아까 개 짖는 소리가 났을 때 누군가 우리 집 현관에 놓고 갔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해서 누군가 궁금했다. 맑은 날도 아닌 오늘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와 놔두고 간 이가 누군지. 물론 몇 사람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내더러 전화하라고 했다. 짐작에 처음 짚은 할머니가 주인공이지 싶었다. 그래서 아내도 먼저 요령껏 물었다.

아내 : 왜 또 열무 두고 가셨어요?
할머니 : 나가? 무신 열무를?
아내 : 에이 다 알아요. 할머니가 갖다놓으셨지요?
할머니 : 구신이 갖다놓았는갑네.
아내 : (웃으며) 그러면 할머니가 귀신이시겠네요.
할머니 : 아이구, 내사 구신이었으면 억수로 좋겠다.

a

작년 가을 다래 좀 팔아줬다고 할머니가 우리 집에 그만큼의 다래를 갖다 놓다. ⓒ 정판수

그 뒤로 몇 마디 더 이어졌고,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새벽에 양남장에 가는 길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

열흘쯤 전에는 또 다른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급한 일이 있으니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 깜짝 놀라 아내가 달려갔다. 시골에서 급한 일이라면 … 심각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런데 돌아온 아내의 손에는 감자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오지 않을까 봐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

보름 전 메주콩을 심어놓고 난 뒤 할머니와 까치 사이에 일어난 처절한(?) 투쟁을 난 기억한다. 콩의 떡잎이 보일 때쯤 그걸 따먹기 위해 떼 지어 날아온 까치들과 그걸 막기 위해 쉼 없이 헌 냄비를 두들기면서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야 이눔들아, 쪼매만 묵고 가라. 제발 쪼매만 묵고 가라."

a

콩 떡잎을 똑똑 따먹는 얄미운 까치에게 "야 이눔들아, 너거가 정 그라몬 내가 너거 집 완전히 뿌사삘 기다"하고 할머니가 공갈 협박을 해대던 감나무 위 까치집 ⓒ 정판수

그러니까 조금 따먹는 건 허락해주겠는데 완전히 콩밭을 작살내지 말아달라는 것. 그러나 새들이 염치를 어찌 알랴. 일주일 가까이 매일 녀석들과 싸우던 할머니가 하루는 녀석들에게 엄청난 공갈 협박(?)을 했다. 우리 집 감나무의 까치집을 올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야 이눔들아, 너거가 정 그라몬 내가 너거 집 완전히 뿌사삘 기다."

그러나 녀석들이 정말 콩밭을 작살냈는데도 까치집은 아직 그대로 있다.

작년 가을 할머니 한 분이 우리 동네에서도 두어 시간을 더 들어간 깊은 산 속을 헤매 따온 다래를 나에게 팔아달라면서 갖고 왔을 때 한 말을 잊지 못한다. 팔아달라는 가격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헐한 듯싶어 좀 더 나은 가격으로 팔아줄 수 있으니 가격은 나에게 맡겨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마 고 만큼만 받으소. 나가 약치고 비료주고 농사지은 기 아니라 기냥 산에 있는 거 따왔은께네 많이 받으면 벌 받을 끼라."

a

당신 먹는 것도 넉넉지 않을 텐데 역시 할머니가 갖다 주신 고구마 ⓒ 정판수

우리 마을 할머니들은 어떤 땐 귀신이 되고, 우렁이 각시도 되고, 천사도 된다. 그냥 한 마디 한 마디 던지는 말들이 따스하다. 좀 투박한 듯하지만 꾸밈도 없고 가식도 없어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요즘 할머니들이 특별히 도를 닦지는 않았으나 이미 베푸는 삶의 깊은 뜻을 깨달은 고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골 #할머니 #고구마 #감자 #다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대통령 온다고 축구장 면적 절반 시멘트 포장, 1시간 쓰고 철거
  2. 2 '김건희·윤석열 스트레스로 죽을 지경' 스님들의 경고
  3. 3 5년 만에 '문제 국가'로 강등된 한국... 성명서가 부끄럽다
  4. 4 플라스틱 24만개가 '둥둥'... 생수병의 위험성, 왜 이제 밝혀졌나
  5. 5 '교통혁명'이라던 GTX의 처참한 성적표, 그 이유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