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책 변호사의 거침없는 '남성로망'

[정윤수 칼럼] <토론 카페> 이안씨 발언 파문을 보며

등록 2007.07.16 09:59수정 2007.07.1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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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토론까페> '알파 걸, 남성을 넘어서는 여성인가'의 한 장면. ⓒ EBS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이 찬반양론의 극단적인 좌석 배치와 그에 따른 격론과 고성의 매너리즘에 빠진 탓에 요즘은 해당 주제보다는 누가 출연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 되는 기이한 상태가 된 듯하다.

물론 찬반양론이나 시시비비를 긴급하게 판단해야 할 다급한 시사 문제라면 그와 같은 형식과 공세적인 출연진이 필요하겠지만, 보다 심원한 깊이로 숙고하고 여러모로 한계와 오류의 가능성까지 검토할 주제도 '찬반'이라는 그릇에 우겨넣다 보니 그 말의 알맹이보다는 누가 더 모질게 말을 하는가가 관심이 되고 마는 우스운 노릇이 나날의 다반사가 되고 말았다.

이 형식이 대세로 굳어지는 바람에 토론자들은, 더욱이 찬반양론이 비교적 선명한 주제에 참여한 토론자들은 더욱더 날카로운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와 같은 분기탱천의 양상이 장안의 흥미를 자극하여 그것만이 토론 프로그램의 수명을 연장하는 가느다란 링거 줄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2일 밤에 방송된 EBS <토론카페> '알파 걸, 남성을 넘어서는 여성인가' 편에 출연했던 가수 이안씨의 경우다.

이안씨의 발언은 경솔했지만...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 토론에서 이안씨는, 토론의 맞상대였던 전원책 변호사와의 설전 과정에서 비웃는 투로 '그래서 (자식이 없으셔서) 그러시는구나'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 순간 이 토론 프로그램은 지난 몇 년 동안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이 속으로 앓아왔던 모든 문제를 한순간에 폭발시켜 버렸다.

개인 사생활과 관련된 경솔한 발언에 당사자인 전원책 변호사는 단호하게 비판하였고 이안씨는 방송이 끝난 후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옮겨간 이 사안은 지난 15일, 이안씨가 자신의 미니 홈피에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사과문을 올려야 할 만큼(이안씨는 하루 전날에도 용서해달라는 사과의 뜻을 올렸고 각 언론사에도 사과문을 보냈다고 한다), 큰 사건이 되고 말았다.

문제의 장면뿐만 아니라 토론회 전체를 다시 보건대, 이안씨의 발언 및 토론에 임하는 태도는 경솔하였고 무엇보다 이른바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짐작컨대 주제에 맞는 '알파 걸'을 제작진이 섭외한 것이 아닌가도 싶은데, 어쨌든 이안씨는 이와 같은 토론이 진지하게, 혹은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필요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안씨의 발언만이 그토록 문제가 되어야 하며 급기야 연거푸 사과 발언을 하면서 자숙의 기간을 갖겠다고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하여 이안씨의 발언 장면만이 편집된 동영상 파일을 본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그 한 대목으로 이안씨(혹은 그와 같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컵라면에 뜨거운 물 부어놓은 듯이 황급히 자기 얘기만 쏟아내는 오늘날의 토론 프로그램에 익숙한 자신을 되돌아 볼 겸 반드시 해당 프로그램의 전체를 일별해 보기 바란다.

프로그램 전체를 다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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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토론까페> '알파 걸, 남성을 넘어서는 여성인가'에 출연한 가수 이안씨. ⓒ EBS

반드시 그렇게 해주기를 당부하는 까닭은 바로 토론의 맞상대였던 전원책 변호사의 발언 때문이다. 아래에 몇 가지를 요약해 본다. 내가 꼭 그 프로그램을 일별해 달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아래 '요약'이 혹시라도 전체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쏙 빼낸 거 아니냐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다. 둘째는 아래의 발언들은 실제 방송에서는 대단히 공세적이며 위압적으로, 게다가 상대방의 발언을 끝까지 듣지 않거나 거칠게 반문하면서 행해진 것임을 확인해보길 바라기 때문이다.

발언 1 : 세계적인 철학가·음악가·시인·화가 이런 사람들 중에 정말 많은 사고를 하고 깊이 사색을 하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각각 순서대로 수잔 손탁(철학), 소피아 구바이둘리나(음악), 넬리 작스(시), 프리다 칼로(화가) 등을 언급하고 싶다. 나는 일부러 이 명단에서 '여성성'을 소재 및 주제로 삼은 여성 학자와 예술가를 포함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예컨대 신디 셔먼이나 버지니아 울프를 언급할 경우 틀림없이 '여성 문제니까 여성이 조금 했겠지'하고 판단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20세기 이전의 인물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전 세기에도 빛나는 성취를 이룬 여성이 없지 않으나 나는 일부러 '여성이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야만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두루 생각해보길 바라기 때문이다.

발언 2 : 거시적으로 볼 줄 알고 깊이 있게 사색하는 건 아무래도 남자가 앞서는 거예요. 그런데 과연 이런 식의 교육 커리큘럼에서 여성이 시험 쳐서 1등 한다, 사법시험에서 1등 한다. 과연 그 사람들이 인간학에 대해서 제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이냐, 저는 회의적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사법 시험에서 1등한 사람이 반드시 인간학에 대해 제대로 판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1등이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문제의 핵심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더욱이 '거시적이며 깊이 있게 사색하는 것'에 성별의 구분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역시 의문이다.

전 변호사에게 '용하다 용해'를 권한다

발언 3 : 6시 땡 되면 퇴근하려고 하는 게 전부 다 여성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스포츠서울>의 인기 연재 만화 '용하다 용해'를 전원책 변호사에게 권하고 싶다. 남성 직장인들이 주인공인 그 만화의 단골 소재는 6시 칼 퇴근이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은 칼 퇴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성별 구분이 있을 수 없는 현대적 삶의 운명이 바로 6시 칼 퇴근이다. 혹시 여성이 자주 그리하였다면 아마도 데이트 약속도 있겠지만 일찍 가서 아이들을 챙겨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난 97년의 IMF 사태 때 각 방송사의 시사 다큐멘터리를 기억해 보라. 거기에는 실직하여 갈 데 없는 남자들이 공원이나 서울역을 어슬렁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여성 실직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왜? 여성 실직자들은 주로 집에서 가사를 하였고 이는 '가정으로 돌아간' 지극히 '자연스런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취재 대상으로 매력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실직의 고통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시선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6시 칼 퇴근도 마찬가지다. 모든 직장인은 6시 칼 퇴근을 욕망한다. 성별 구분이 없는 얘기다. 있다면 이를 바라보면 시선의 차이 뿐이다.

발언 4 : 힘든 3D 직종은 아직도 남성이 다 하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데가 군대 아닙니까? 거리의 청소부 중에 여자 봤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직업, 편한 직업은 반씩 나누자는 거예요.

이에 대하여 나는 반반씩 나눌 수 있는 '재미있고 편한 직업'이 뭐가 있을까 대단히 의아스러운데, 그 전에 우선 관련 기사를 소개하고 싶다.

"올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0%를 넘었지만, 여성 중 비정규직은 67.6%에 달했고, 월평균 162만1천원으로, 남성의 52.8%에 불과"(한겨레, 2007. 6.25)하다는 기사가 그 하나이며 "여성 근로자 10명 가운데 4명은 임시일용직에 종사, 지난해 전체 여성 취업자 가운데 임시일용직은 40.8%, 이에 비해 남성 취업자 임시일용직 비율은 25.2%, 또한 여성근로자가 평균적으로 받는 임금은 남성의 63.4%로 2001년(64.3%)보다 오히려 격차가 더 커진 것"(머니투데이, 2007. 7.3)이라는 기사가 그 다음이다.

<머니투데이>의 기사에서는 국가별 여성권한 척도 순위에서 한국이 조사 대상 78개국 가운데 53위에 그쳤다고 쓰고 있다. 여성권한 척도란 여성의 의회의석 점유율, 관리직 전문직 비율, 소득 차이 등에 있어 여성의 권한을 나타내는 것인데 아마도 이것이 전 변호사가 얘기하는 '재미있고 편한 직업'이 아닐까 싶다.

이마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여성이 반 정도는 참여할 수 있는 '재미있고 편한 직업'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이 세상에 재미있으면서도 더욱이 편한 직업이 과연 있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성들의 지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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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토론까페> '알파 걸, 남성을 넘어서는 여성인가'에 출연한 전원책 변호사. ⓒ EBS

아무튼, 얘기가 길어졌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원책 변호사는 이와 같은 '문제적 발언'을 대단히 공세적으로 집요하게,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개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점 때문에, 얼마 전의 KBS <심야토론>에서 얻은 '전거성'이라는 별칭이 더욱더 격렬한 관심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주장이 사실은 주류 남성 사회, 좀더 확대하여 한국의 주류 사회에서도 점점 더 낡은 것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한 여성 후보들이 등장하고 호주제 폐지에 따라 개인호적부까지 도입되는 마당에 위와 같은 주장은 가치론의 측면에서나 득표력 내지는 재사회화의 관점에서나 그다지 매력적인 주장은 아니다.

사실 나는 몇 년 전의 토론에서, 전원책 변호사의 '왜 국가가 담뱃값을 올려 팔면서 동시에 강력한 금연책으로 애연가들을 괴롭히는가'라는 매우 '호소력' 있는 발언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같은 정보를 두루 종합할 때 그는 '가부장의 국가화'는 아니지만 매우 남성적인 로망에 빠져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역시 지난 12일의 <토론 카페>다. 그 날의 토론에서, 한 순간의 실언을 한 이안씨는 사과를 하고 자숙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원책 변호사는 시종을 일관했던 자신의 단호한 주장과 거침없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그가 뭔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 가지 쯤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안씨의 한순간 발언 때문에 전원책 변호사의 장황하고도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제와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찬반양론의 대결 구도를 잡으려는 현행의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반성이다. 일그러진 그릇 때문에 중요한 내용이 가려지는 경우가 흔하다.

셋째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대단히 서민적인 단어와 거침없는 발언으로 뭇 남성의, 그것도 군대 갔다온 남성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전원책 변호사가, 그리고 그를 지지한 많은 남성들이, 실은 '거친 세상에 나와 모진 풍파를 다 겪었다'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남성로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축구장에는 '폭우는 우리 편만 적시는 게 아니다'는 명언이 전해 내려온다. 세상 이치도 그렇다. 모진 세파가 남녀 구분 없이 몰아쳐 오는 세상에서 남성만이 뭔가 '거시적'인 안목으로 큰 세계에 맞선 외로운 인간인 양 행세할 때는 결코 아니다. 그 이전에도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아니다.
#전원책 #이안 #남성 #여성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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