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행자 플라멩코와 지독한 사랑에 빠지다

수필가 김준형, 편지산문집 <플라멩코 이야기> 펴내

등록 2007.07.20 10:45수정 2007.07.2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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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름다운 것과 모든 어두움을 일깨워 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어느 사랑의 이야기.

그 밝은 빛으로 나의 삶을 뒤흔들고,
이렇게 다시 그걸 거두어 가버리다니
아, 삶은 이토록 어둡기만 할까!
나 이제 살 수가 없어, 너의 사랑 없이.

-스페인 애송시 '어느 사랑의 이야기' 몇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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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플라멩코 이야기> ⓒ 도서출판 선

여기...스페인 플라멩코의 깊은 노래 속에, 그 춤꾼 로레나의 매력적인 손놀림과 발놀림에 포옥 빠진 한 여행자가 있다. 스스로 "탕수국 내음 풍기는 나이"라고 말하는 그 여행자는 풀라멩코 춤을 추는 로레나의 품을 떠나서도 오랫동안 플라멩코의 리듬과 소곤거림을 결코 잊지 못한다. 어쩌면 여행자는 죽는 그날까지, 죽어서도 "우물보다, 그리고 바다보다 더 깊은 플라멩코"와 로레나를 끝내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첫 입맞춤과 첫 흐느낌으로부터 나온다'는 플라멩코. 여행자는 무엇 때문에? 왜? 플라멩코와 플라멩코 춤꾼 로레나에게 모든 것을 다 거는 것일까. "그 노래와 춤에 담긴 집시들의 치유할 수 없는 내면의 상처, 빛과 색체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열정 그리고 자유에의 식을 줄 모르는 갈망" 때문일까. 아니면 "삶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실존주의적 고통 때문일까.

여행자는 고백한다. "스페인어를 잘 할 수 있었다면!" 하고. 그랬다면 플라멩코에 배인 색체나 빛으로 빚어진 그 소리뿐만 아니라 그 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언어적 아우성 속에 든 은밀한 속삭임까지도 다 마음에 가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찬란한 보석들이 숨겨진 플라멩코라는 이름이 붙은 동굴의 들머리에 서서 그 동굴 문을 열 수 있는 암호를 풀지 못해 그 곁을 맴돌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플라멩코의 '깊은 노래'는 어딘가 판소리 심청가나 춘향가를 떠올리게 한다. 소리꾼의 거친 쇳소리와 그 고유의 표현주의적 창법에서 그렇다. 악보에 담기지 않는 곰삭은 소리에 담긴 슬픔이 깊어 그렇다. 그리고 플라멩코나 판소리 공연에서 청중은 그냥 자리만 지키는 구경꾼이 아니다. 그들은 소리꾼과 상호작용을 통해 관객과 소리꾼이 하나가 되어 호흡을 함께 나눈다." -'서문' 몇 토막

우리말로 꺾어진 육십의 나이에 플라멩코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우리나라 살풀이춤을 배우고 있다는 "꿈꾸는 소년" 김준형(64). 그가 편지산문집 <플라멩코 이야기>(도서출판 선)를 펴냈다. 이 책은 그가 스페인으로 플라멩코를 향한 아름답지만 힘겨운 여행을 다녀온 뒤 플라멩코 춤꾼 로레나와 이메일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이 주춧돌을 이루고 있다.

아이! 아이! Ay, 아침이슬을 플라멩코로 춤추다, 스페인으로 비행하면서, 그라나다, 카디스의 빛과 바다, 헤레스에서 '서편제'를 보다, 시인 천상병의 귀천을 플라멩코로!, 영혼의 춤, 살풀이춤과 플라멩코, 플라멩코와 발레, 세비아에 다시 간다면, 타리파의 바람과 비수, 마드리드의 선물 등 13편과 부록에 실린 '오늘날의 플라멩코' '이메일 편지들'이 그것.

연세대 정외과를 나와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지난 6월 15일 서비스를 시작한 인터넷종합일간지 <뉴스큐> 논설위원을 맡고 있는 김준형은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 지역을 떠도는 이 여행자의 뇌리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얼굴들-로레나, 제이, '그녀' 등-은 어떤 특정의 인물이라기보다, 안달루시아 지역의 이국적 선율과 율동에, 특히 옛 도시 헤레스의 포도주에 유혹될 독자 자신이나 혹은 그들의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김준형은 우리의 판소리와 플라멩코에 대해서도 "플라멩코와 판소리는 그 귀결점이 다르다"며 "우리들을 울리는 심청가나 춘향가가 모진 고난 뒤에 낙천주의적 밝은 화해로 그 끝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예각성의 비극적 분위기가 현저한 플라멩코의 경우, 포도주에 젖은 그 거친 절망의 외침은 아득히 아득히 사라질 뿐"이라고 속삭인다.

"나는 이 시(천상병의 '귀천')를, 그리고 이 시인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풀잎 위에서 반짝이는 아침이슬의 보석으로, 서편 하늘의 신비로운 저녁놀의 송가로 이 땅 위의 우리들 곁에 남아 그 창조적 긍정의 샘물로 흐려지기 쉬운 우리 영혼의 눈을 끊임없이 맑게 씻어주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귀하게 표현하는 플라멩코의 '깊은 춤'이 나의 열망을 이루어지게 도와 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59~60쪽 '시인 천상병의 귀천을 플라멩코로!' 몇 토막

육십대 중반에 플라멩코를 애인으로 삼게 된 이유

플라멩코와의 지독한 사랑에 포옥 빠진 '꿈꾸는 소년' 김준형. 김준형에게 '꿈꾸는 소년'이란 또 하나의 이름이 붙은 것은 다름 아닌, 육십대 중반에 플라멩코 춤과 그 춤꾼 로레나와의 사랑에 빠져 꿈꾸는 소년처럼 여기저기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와 미술, 예술인,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쓴 소주 한 잔이라도 나누어야 맘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그다.

김준형이 어느 날 문득 플라멩코를 애인으로 삼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앞, 미국 서부의 한 도시 공연장에서 플라멩코 노래 중 하나인 '시규리어'를 들으면서부터다. 그는 그때부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아름다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플라멩코 춤꾼 로레나와의 아브라죠(포옹)를 통해 우리나라 판소리와 노래를 플라멩코 춤과 노래로 불려지기를 꿈꾼다.

그가 한 여행자가 된 것도, 고향인 경남 마산으로 돌아와, 마산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플라멩코 춤을 출 줄 아는 서양화가 김진숙을 만나게 된 것도 그 오랜 로맨스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더불어 오랜 짝사랑 끝에 플라멩코의 뿌리가 숨어 있는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된 것도, 그가 나이와는 별개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꿈꾸는 소년"이자 "창동신사"로 불려지게 된 것도 그 놈(?)의 짝사랑 때문이리라.

"로레나에게/ 지금 이곳은 다시 마드리드입니다. 혼자 스페인에 날라와 처음 머물렀던 호스텔 매드에서 그때처럼 싱그리아를 큰 잔으로 마시며 지난 한 달 간의 안달루시아 여행길을 뒤돌아보고 있습니다.

처음의 그 큰 잔은 스페인으로의 긴 비행 후 낯 선 땅의 첫 숙소에 무사히 안착한 것에 대한 안도의 잔이었고, 두 번째 것은 수도승이 그럴 것 같은 탈속적인 몸과 마음으로 나섰던, 그리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아 애를 먹었던 안달루시아 여행을 무사히 끝낸 데 대한 자축의 잔이었습니다.

어디에서나 플라멩코-춤과 노래 그리고 기타소리-가 있는 곳이면 나는 언제나 그곳에 내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해안에서 빛과 파도소리로 가득한 새벽을 맞은 카디스에서도, 밤이면 플라멩코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여행 전의 어떤 내면의 목마름-그게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을 석류라는 이름의 땅 그라나다에서 탐욕스럽게 달랠 수 있었습니다." -97~98쪽, '마드리드의 선물' 몇 토막


플라멩코를 향한, 플라멩코 춤꾼 로레나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한 여행자 김준형. 그는 말한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남원 땅의 소리꾼들 곁으로 가 그들 곁에서 북채를 잡으리라"고. 그리고 "고수가 되리라. 아니면 다시 이곳 안달루시아의 세빌라로 다시 날아와 팔마스를 배우리라. 아니야, 우리 가곡 금강산을 로레나로 하여금 춤추게 하고 싶다"고.

플라멩코와 플라멩코 춤꾼 로레나와 하나가 된 '꿈꾸는 소년' 김준형. 그가 그토록 가슴 깊숙이 아름답게 품고 있는 그 사랑은 과연 아름다운 짝사랑으로 그치고 말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깊은 사랑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에 대한 정답은 그가 이 책 끝자락에서 로레나에게 보낸 편지구절 "그 노래에 담긴 슬픔의 이슬방울들을 그녀(로레나)로 하여금 춤추게" 하는 그 바람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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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준형 ⓒ 이종찬

재미난 것은 이 책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진 글 "글 속의 '나', jh라는 이니셜의 한 여행자가 미국인 플라멩코 댄서 로레나 마로너에게 보낸 편지"의 주인공이라는 것. 그쯤 끝냈으면 됐다. 하지만 김준형은 "그가 스페인 여행 중에 그녀에게 보낸 이메일을 필자(김준형)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에 살을 적당히 붙여 편집하였던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근데, 김준형은 그도 모자랐던지 "이 글은 jh의 편지 모음이므로 엄격히 말해 그의 창작물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단지 그의 편지들을 우리말로 충실하게 옮긴 역자일 뿐이다"라고 또다시 되짚는다. 과연 그럴까? 로레나와의 편지 속에 나오는 'jh'라는 사람은 이 책을 엮은 '준형'의 약자가 아닌가. 바로 이 점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글맛과 더욱 폭넓은 상상력을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

한편 오는 21일(토) 오후 6시 30분, 경남 마산 가고파문화센터 전시실에서 김준형의 <플라멩코 이야기> 출판에 따른 북 사인회와 공연이 열린다. 이날 행사는 경남대 정자봉 교수가 축사를, 교당 김대환 한국화가가 묵화 한 점을, 김진숙 서양화가가 플라멩코 춤을 선보인다. 사회는 한국화가 윤복희 교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큐><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뉴스큐><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플라멩코 이야기

김준형 지음,
선, 2007


#김준형 #플라멩코 #스페인 #판소리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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