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인연과 악연의 '나비효과'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등록 2007.07.22 12:01수정 2007.07.2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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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튼 커처가 주연했던 <나비효과>라는 영화에 보면, 사소한 선택이나 인연이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어떻게,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과거의 악연을 바로잡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지만 그가 노력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한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친구들을 불행에서 구원하려는 선의의 의도지만, 지인들의 입장에서는 친구(혹은 애물단지) 하나 잘못 둔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차례나 인생이 극적으로 요동치게 되는 셈이다.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일들이, 정작 한 인간과 시대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나비효과'로 작용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만약 한니발이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잡았더라면, 당현종이 양귀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축구협회가 2002년 월드컵 이전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성적 부진으로 경질했다면?

역사에서 'If'라는 가정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지만, 선택의 차이에 따라 무수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설들은 언제나 흥미롭다. 작은 인연이 평범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결정적인 인물이나 사건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사건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아돌프 히틀러를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기란 어렵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던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정서가 알고 보면 당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적대감이라는 '나비효과'에서 잉태되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희대의 독재자와 지식인간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그린비)의 저자 킴벌리 코니시는 방대적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조사 속에 히틀러가 비트겐슈타인과 같이 유년시절 한때 오스트리아 북부 레알슐레에서 동문수학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서 히틀러는 유대인 출신인 비트겐슈타인에게 공공연한 적개심과 공격성을 드러냈으며 노골적으로 그를 왕따시켰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히틀러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원한은 질투에서 시작됐다. 유년 시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히틀러에 비하여, 부유한 가문 출신이던 비트겐슈타인은 히틀러가 누리지 못한 문화-예술적 특권을 마음껏 향유했고, 이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비트겐슈타인 개인에 대한 시기를 넘어 유대인을 향한 본능적 적개심으로 성장했다.

또한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은 유년시절 이후에도 서로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나 바그너의 음악세계에 심취하며 기묘한 '정서적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히틀러가 이후 나치 정권의 실력자로 성장하면서 20세기 초 유럽 사회를 강타한 반유대주의 정서에 자신의 사상적 정당성을 결합시키며 홀로코스트의 광풍을 주도하고 말았다는 추론이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의 악연을 통하여 유럽 지성사의 이면에 숨겨진 그늘과 시대적 악순환을 조명하는 킴벌리 코시니의 추론은 흥미롭지만, 한편으로 비약도 있다. 무엇보다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륜적인 거대한 비극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히틀러 같은 몇몇 인물들의 개인사를 통해서 일반화하는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음모론'에 가까운 인상을 주기 때문.

그러나 적어도 히틀러가 사실상 홀로코스트를 주도했으며, 반유대주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켰던 핵심 인물임을 감안할 때, 히틀러라는 인간이 지닌 폭력성과 가치관의 근원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탐색해보는 과정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어쩌면 한 인간의 가치관이라든가 거창해 보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알고 보면 대단히 유치한 동기나 사소한 우연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권력자나 사회적 지성들이 알고 보면 대단히 좀스럽고(?), 편견과 열등감을 미화하는 감정적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진실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투쟁>이나 1920년대 인터뷰 기록에서 반유대주의 노선을 취하게 된 배경이 '어느 유대인'에 대한 사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히틀러에게 있어서 평생 열등감의 산물이었던 비트겐슈타인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저항활동'을 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흥미롭다.

비트겐슈타인은 2차대전 역시 최대 격전지였던 유럽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대를 도와서 독일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히틀러에 복수했다거나 2차대전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비약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러시아 전선에서의 패배가 독일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결국 히틀러를 자살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었음을 생각할 때, 사소하게 시작된 '악연의 나비효과'는 결국 돌고 돌아서 인과응보로 이어졌다고 할만하다.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 두 천재의 투쟁과 홀로코스트의 배후

킴벌리 코니시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7


#나비효과 #비트겐슈타인 #반유대주의 #히틀러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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