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마을버스 정류장은 '사랑방'

등록 2007.08.02 09:49수정 2007.08.0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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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는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웃없이는 살아 갈 수 없다. <화라>

그리운 정자, 그리운 말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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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좀 좋아 ? ⓒ 송유미

우리 동네 마을버스 정류장은 참말로 형편없다. 형편이 없으나 참말로 재미있다. 15~20분 간격, 아니 20~30분 간격, 차량이 밀리면 더 이상도 기다려야 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승용차가 없는 중·고등학생이나 노인들이다.

각 가정마다 승용차가 2대씩 있는 가구도 있는 우리 동네. 도로 하나 건너면 서울처럼 고층 아파트 숲이 즐비하고, 주차장마다 차가 가득하지만, 삼팔선 이북처럼 연립주택과 옹기종기 모인 한옥들과 낡은 아파트가 있는 우리동네는 승용차가 있는 사람보다 그래도 없는 가구가 더 많다. 그런데 젊은 층보다 노인층이 더 많은 우리동네의 노인들은 대부분 여성인 할머니들이 많다.

"내 잠시 집에 가서 큰 일 보고 다시 올끼다."
"알았어. 퍼뜩 온나."
"참, 앞집 돌이 할매도 데리고 온나. 그리고 참 부채도 잊지 말고 챙겨 온나."

버스는 얼마나 기다려도 오지 않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귀동냥 하니, 나란히 앉아 계신 할머니 세 분의 대화 내용은 답답한 집안보다 마을 버스 정류장이 그 옛날 정자처럼 모여서 놀기 좋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무 그늘이고, 나무 그늘아래 사방 트인 정자 같은 마을 버스 정류장에 나오면 사람 구경이 좋아,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가까운 채마밭에 채소 가꾸기도 여기 나와 있으면 쪼르르 달려가서 물도 주고 풀도 뽑아 주었다가, 쉬기도 하고 아는 사람 만나면 이야기도 하고 좀 좋으냐는 그런 내용이다.

저잣거리처럼 정자처럼...정겨운 마을 버스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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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마을버스 ⓒ 송유미

왠지 무슨 무슨 동보다 마을이 좋고, 그냥 버스보다는 마을 버스가 정겹다. 마을 버스 정류장도 그렇지만 마을버스를 타면 왠지 고향길의 버스를 탄 것처럼 편하다. 가격도 싸고 버스 안도 널널하고 요즘은 냉방까지 잘 되어서 마을 버스를 타고 한 바퀴 일부러 돌기도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사는 이야기에 귀를 열면 단편소설 읽는 것처럼 재미날 때도 있다. 남의 이야기 듣다보면 괜히 재미난다. 핸드폰으로 떠들어 대는 이야기도 왠지 코믹하게 느껴진다.

"남이 장에 간다고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는 속담처럼 사람 사는 이야기 속에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나도 저런 옷을 입어봐야지, 그런 견물생심들이 북적이는 사람 속에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더구나 자식들과 각각 떨어져 살고 있는 할머니들의 말씀처럼, 사람 구경보다 더 좋은 구경이 없는 것이다.

피서는 사람 구경, 피서지에 갈 수 없는 처지의 우리 동네 할머니들은 이 여름 사람 구경으로 피서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문명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안 바뀐다.

마을 버스 정류장은 마을의 공공장소, 서로들 얼굴을 몰라도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고 어디가서 무얼 사왔냐고 묻고,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서로 만나 새 이웃을 아는 만남의 장소이다.

한 동네 살고 있어도 몰랐던 아는 사람도 우연히 만나고, 서로들 사는 이야기 털어 놓다보면 자연스럽게 혼담도 오고 가고,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고 또 다른 좋은 인연을 알게 된다.

그러나 대중교통 이용이 작아지고 자가용이 많아질 수록 도심을 벗어난 버스 정류장은 한적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 살아도 어느 시인의 시처럼 사람 곁에 있어도 외로운 시대, 그래도 우리 동네 마을 버스 정류장은 사람 사는 동네처럼 훈훈하고, 늙은 느티나무도 사람이 좋은지 오늘 따라 유난히도 푸르다.

아름답게 늙는 법은 어디서 배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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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 안 탄다. 그만 가라. 마을버스정류장의 만남터 ⓒ 송유미

보기도 시원한 모시옷을 입은 할머니 두분, 마을 버스가 닿자 이구 동성, "우리는 차 안 탄다. 그만 가라" 부르릉 부르릉 마을 버스는 그냥 할머니들 말 한 마디에 질주한다. 버스 정류장은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만남의 장소, 할머니들의 말의 샘터, 그 옛날 우물가에 모이듯이, 정자에 모이듯이….

나는 늙어서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노인이 될 수 있을까. 그저 부럽기만 하다. 늙는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흉한 것도 아닌 여유자적의 미를 할머니들의 대화와 빳빳하게 정갈한 모시 옷에서 느낀다.

삶은 아름답다. 노인은 더 아름답다.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축복인데, 아름답게 늙는 방법 같은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나. 가만히 생각하면 할머니의 얼굴이 미래의 나의 얼굴의 거울인데.
#마을버스 #정류장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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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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