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적 세계관'은 아편전쟁 이전부터 흔들렸다

'동아시아사 연구의 신지평' 국제학술토론회 발표

등록 2007.08.05 16:46수정 2007.08.05 17:17
0
원고료로 응원
지난 8월 2일 오후 중국 칭화대학(청화대학)에서 한국(성균관대), 중국(칭화대), 미국(예일대·워싱턴대·캘리포니아대)의 동아시아 연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아시아사 연구의 신지평'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아래 글은 이 학술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네르친스크조약과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상관관계'라는 논문의 일부을 소개한 것입니다. 일부 중국측 연구자들이 논문 내용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긴 했지만, 중국인들의 허황된 역사인식은 앞으로도 계속 학술적 방법 등에 의해 타파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발표장에서의 토론 내용을 반영하여 이 기사에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음을 밝힙니다. <기자 주>

a

베이징대학(북경대학) 교내에 있는 '진흥중화' 비석. '중화를 진흥시키자'라는 비문의 내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의 지식인들 역시 비이성적이라고 할만치 중화주의에 대해 애착을 보이고 있다. ⓒ 김종성

중국인의 세계 관념은 흔히 중화적 세계관이라고 불린다. 세계의 중심에 한족과 중국이 있다는 중화적 세계관은 아편전쟁(1840년)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1840년 이전에는 중화적 세계관이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온전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중화적 세계관은 그리 확고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중화적 세계관은 '언제나'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여진족에 대한 중국 왕조의 태도 변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진족은 본래 고려에 사대하던 종족이었다. 그러나 그 여진족이 강성해져서 금나라를 세운 이후, 한족 정권인 송나라(남송)는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직을 보존하자면, 금나라를 군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유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이 확고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면, 국제정치적 변화에도 여전히 여진족을 종래대로 대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역대 중국 왕조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국력을 통해서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중국인의 세계관이 그리 온전한 것이 못 되었다는 여러 증거 가운데에서 보다 더 강력한 것은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네르친스크조약(중국측 표현은 '니부추조약')이다. 1689년(강희 28년) 9월 7일에 체결된 네르친스크조약을 통해 양국은 만주 북쪽의 스타노보이산맥을 서로 간의 경계로 획정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시점은 아편전쟁이 발생하기 이전이었다. 그때는 동아시아에서 전통적 국제질서가 한창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긴 했지만 만주족이 스스로 한화(漢花)되어 중국적 시스템을 채택하였으므로, 오늘날의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듯이 청나라는 명실상부한 중국 왕조였다. 또 대외조약에서 '중국'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왕조는 네르친스크조약 당시의 청나라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나라 지배층은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기에 청나라는 네르친스크조약을 통해 중화적 세계관을 스스로 포기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러한 점을 이 조약의 전문(前文)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대성황제 흠차분계대신들인 의정대신·영시위내대신 '색액도', 내대신·도통·일등공·구구 '동국강', 도통 '랑해', 도통 '반달이선', 진수흑룡강등처장군 '살포소', 호군통령 '마라', 이번원시랑 '온달'이 러시아 찰한한(차르) 사신 '아곤니' 등과 니부추 지방에서 조약을 협의하였다."(中國大聖皇帝欽差分界大臣議政大臣領侍衛內大臣索額圖內大臣都統等一等公舅舅佟國綱都統郞該都統班達爾善鎭守黑龍江等處將軍薩布素護軍統領瑪喇理藩院侍郞溫達會同俄羅斯察罕汗使臣俄昆尼等在尼布楚地方公議約)

여기서 작은따옴표를 친 부분은 양국 외교관들의 이름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 조약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획정했다는 점이 주로 강조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조약의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형식적 특징 속에는 중화적 세계관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위의 전문에서는 "중국 황제의 사신들과 러시아 차르의 사신들이 조약을 협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는 중국 황제와 러시아 차르가 상호 대등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며 중국과 관계를 체결하는 나라는 중국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중국 중심 사고에서는 이 같은 상호 대등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러시아 세력의 동진(東進)이라는 위협적인 현실 앞에 놓인 중국 왕조는 또다시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중국의 우월성을 포기하고 러시아와 상호 대등한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엄혹한 현실' 앞에서 중국인들은 '허황된 관념'의 덧없음을 재차 깨달은 것이다.

고려에게 사대하던 여진족이 강성해지자 '관념상의 중화주의'를 포기하고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을 한 송나라처럼, 청나라도 또 한 번 그러한 '바람직한 선택'을 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중화적 세계관이 확고부동한 것이었다면, 과연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중국인들의 중화적 세계관은 이미 아편전쟁 이전부터 흔들리고 있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리 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중화적 세계관은 과거 역사 속에서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같은 역사상의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주변 지역에 비해 국력이 우월할 때에는 중화주의를 내세우던 중국 왕조들은, 국력이 약해지면 그 허황된 역사인식을 포기하고 기꺼이 현실적 선택을 하곤 했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예외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자부하면서 중화적 세계관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개혁·개방이라는 당면 목표 앞에서 현재의 중국은 또다시 미국이라는 '이민족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것이 과연 중화적 세계관의 소유자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일까? 힘이 약할 때에는 언제나 포기되고 마는 중화주의를 과연 온전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허황된 세계관을 갖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과연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현실과 괴리된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올바른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질 때에만, 중국은 한국 등 이웃나라들과 제대로 된 '인격적 국제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세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보아야 할 것이다.
#중화적 세계관 #네르친스크 조약 #중화주의 #아편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