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탈출, 마지막 표적을 정조준하라

[태종 이방원 147] 기사회생한 하륜

등록 2007.08.22 18:23수정 2007.08.2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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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천우·허조·박습과 위관(委官) 최이·서선 그리고 대사헌(大司憲) 이원, 형조판서 성발도, 우사간(右司諫) 조계생이 편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륜을 체포하여 빙문(憑問)하기를 청합니다."

천하의 하륜을 체포하여 심문하자는 것이다. 말이 예를 갖춰 물어본다는 것이지 일단 피의자 신분으로 의금부 문턱을 넘어서면 대우가 달라진다. 죄인 취급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기관의 속성이다. 몰리면 죽어야 하고, 혐의를 명쾌하게 해명한다 해도 원로대신의 체면은 구겨진다. 하륜에겐 절체절명의 위기다.

하륜은 태종 정권을 탄생시키고 이끌어온 중심세력이다. 하지만 하륜을 반대하고 시기하는 세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태종을 떠받치고 있는 양대 세력이 충돌한 것이다. 공격하는 세력은 준비된 수순이고 당하는 하륜은 허를 찔린 것이다. 이제는 비켜갈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결전이 닥친 것이다.

"이지성의 일을 결단하여 끝내도록 했는데 어찌하여 일을 끝내지 않고 왔는가?"

하륜의 처조카 이지성은 고모부인 하륜의 천거로 출사하여 호군(護軍)이 되었으나 민무질의 수하가 되었다. 세자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민무질은 죄가 없다'는 발설로 귀국 즉시 용궁현에 귀양 갔다. 민무질을 추종하는 그가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죽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말한 것이 민무휼을 옹호한다는 것이다. 이지성의 협기 어린 실언이 하륜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아끼는 사람을 몸으로 막아주는 군주

"신들은 이지성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륜이 해명한다면 자신이 편안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자기에게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금부제조 이천우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이미 중지하라고 명한 것을 어찌하여 듣지 않는가? 신하들이 몰려온다고 군왕이 그것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륜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라도 있단 말인가?"

태종은 불쾌한 표정으로 역정을 내었다.

"말의 실마리가 이미 나왔으니 거짓이건 사실이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륜이 해명하지 않는다면 나라 사람들이 그를 의심할 것입니다. 만약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하지 않는다면 당직청(當直聽)에 불러다가 이를 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원·성발도·조계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삼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라의 원로를 국문하기 거북하면 당직청에 소환하여 심문할 수 있도록 윤허해달라고 대사헌 이원이 청했다.

"이지성의 죄가 끝난 뒤에 하륜이 어찌 해명하지 않겠는가?"

"전하의 하교가 비록 이와 같으나 법관이 그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리 만류해도 대간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 협박조다. 태종은 한 발 뺐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이지성에 대한 심문을 재개한 서선과 의금부진무 전흥이 대궐에 나와 계본(啓本)을 올렸다.

"이지성을 심문하였으나 불복하기에 곤장 10여대를 때리니 이지성이 바로 불기를 '민무질이 어찌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륜이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전날의 말과 다른가?'라고 물으니 '뜻은 한가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공초(供招)를 받지 않는 까닭은 무슨 연유인가?"

"뜻은 한가지다라고 하여 다시 공사(供辭)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어제 심문에서 이지성의 계책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는데 왜들 이러는가? 너희들은 임금을 대신하여 그를 국문(鞫問)하였는데 이 같은 일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니 너희들을 무엇에다 쓰겠는가? 이봐라. 지신사는 어디 있는가? 이자들을 모두 끌어내도록 하라."

격노한 태종은 불호령을 내렸다. 조금은 과잉 역정이다. 시뮬레이션 반칙은 심판의 제재를 받지만 여기에서는 반칙자가 심판이다. 기겁한 지신사가 호위 군사를 불러들여 신하들을 끌어냈다. 하지만 태종의 눈은 예리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죄인이 하륜을 끌어들이면 살아날 구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지성의 계략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말썽의 씨앗을 없애버려라

노한 태종은 신문을 잘못하도록 방치한 대사헌 이원에게 귀가하라 명하고 그 나머지 대원(臺員)들도 사람을 시켜 집으로 압송(押送)하게 하는 한편 집의(執義) 정초, 장령(掌令) 허반석, 지평(持平) 오영로·윤수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하고 이지성의 목을 즉시 베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날 밤, 이지성의 목이 떨어졌다. 전광석화다. 이지성의 잔머리에 조정이 놀아나면 시끄러워진다. 그러기 전에 말썽의 씨앗을 없애버리고 아끼는 신하를 보호하기 위한 순발력이었다. 두 세력의 충돌에서 계속 밀리던 하륜이 기사회생의 숨통이 트인 것이다.

이튿날, 태종은 이천우·허조·박습·성발도·최이·이원·서선·조계생·유사눌·탁신을 편전으로 불렀다.

"이지성이 대신을 끌어들여 해치고자 하지만 하륜은 반드시 나를 배반하고 민무질에게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들은 어제 추문(推問)을 잘못한 사건을 가지고 재삼 신청했지만 내 마음이 편안치 못하여 귀가하도록 명하였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혼란을 수습한 태종은 최한을 하륜의 집으로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옛날에 소하(蕭何)도 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하공이 어찌 사직에 반심(叛心)이 있겠는가? 하공을 믿기에 굳이 변명하지 않게 한 것이다."

무한한 신뢰다. 태종의 전지를 받은 하륜은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 감격의 배사(拜謝)다. 기사회생한 하륜은 전의를 불태웠고 선공을 가한 반대세력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전세가 반전된 것이다.

마지막 표적을 정조준하라

태종의 신뢰로 위기를 탈출한 하륜은 반격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했다. 때마침 인사이동에 지신사 유사눌을 날려버리고 자기 사람을 심었다. 좌도병마도절제사에 권만, 우도병마도절제사에 신열을 배치하여 부족한 무(武)를 보강하고 변계량에게 수문전제학을, 박희중에게 춘추관기주관을 제수하도록 했다. 임금을 보필하는 변계량과 박희중은 하륜 문생이다.

인사이동을 끝낸 태종이 지신사 조말생을 불렀다.

"하륜이 70에 치사(致仕)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청하는데 바로 자신이 치사하고자 함인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하륜은 관직을 벗고 뛰는 것이 홀가분하다고 생각했다. 법도에는 있지만 사문화된 치사제도를 시행하도록 주청했다. 신하들은 몸져눕거나 결정적인 하자가 발생하지 않는 한 임금이 그만두라 할 때까지 관직에 봉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치사는 오늘날의 정년이다.

"신자(臣子)가 왕사(王事)에 근로하다가 나이 70세 이르면 치사(致仕)하고 한가함을 얻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은 옛날의 양법(良法)입니다. 사람이 70에 이르면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70이 된 자로 하여금 모두 치사하도록 하소서. 그가 어찌 치사하고자 하여 이러한 청을 갑자기 하겠습니까?"

"하륜이 나랏일을 자기 집같이 하였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진언하였다. 지금 국가가 편안한 것도 하륜의 힘이 아닌가? 내가 들어주려 한다."

하륜이 드디어 관직을 벗었다. 홀가분하다.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다. 임금 곁에 바짝 붙어 이숙번의 수족노릇을 하던 지신사 유사눌을 소합유(蘇合油) 부정 혐의로 귀양 보낸 하륜은 마지막 표적을 향하여 정조준했다. 당긴 시위를 놓기만 하면 된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표적을 정확히 꿰뚫을지 바람을 맞아 벗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륜 #이숙번 #이방원 #유사눌 #조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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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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