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등록 2007.08.23 14:12수정 2007.08.2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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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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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성

아침에 집을 나서면 꼭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다. 신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돌아올 때도 이 다리를 건넌다. 다리 길이는 120m다. 하중은? … 봤는데 까먹었다. 아침 여섯 시 오십 분, 집을 나서 다리 사이에서 요령 소리가 나도록 30분을 걸으면 이 다리 앞 횡단보도에 도착한다.

갈 길은 멀어도 여기에선 멈춰야 한다. 횡단보도와 마주하고 있는 파출소 때문은 아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네거리 신호등 중에서도 이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는 교통이 복잡해서 멈춰서야 하는 몇 안 되는 네거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때쯤이면 팔을 흔들 때마다 겨드랑이엔 비누칠을 해놓은 것처럼 땀이 미끈거리고 등허리를 타고 '빤스'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땀을 느낄 수 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다시 걷기 시작해서 다리의 사 분의 삼 정도를 건너면 다리 건너편에 이어져 있는 다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다.

이 때부터는 뛴다. 걸어가도 신호가 끝나기 전에 건너갈 수 있고 시간 여유도 '빵빵' 하다. 그래도 나는 뛴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어느 날 뛰기 시작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뛰는 것이다. 속으로 왼발을 헤아리며 뛴다. 60번을 헤아리면 다리와 신호등을 완전히 건넌다. 그러니까 120보를 뛰는 것이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면 보너스로 다섯 번이나 일곱 번쯤 더 뛰어주기도 한다.

'푸히히' 이 때쯤이면 머리엔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고 관자놀이가 화끈거린다. 러닝셔츠는 완전히 물에 담갔다 꺼낸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사십일 분이 지나면 쇼핑몰 앞을 지나고, 사십오 분이면 다시 한 번 뛰어야 하는 코스가 나온다. 이번에는 다리 밑이다. 왜 뛰어야 하느냐 하면 이 다리 밑에 도착을 해 걷다 보면 저 위쪽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한 번 놓치면 신호가 네거리를 한 바퀴 돌 동안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걸어봐라, 가다가 서는 것은 고통이다. 걷다가 신호가 좌회전으로 바뀌는 순간 나도 숄더백을 들고 뛰기 시작한다. 좌회전 신호가 끝나면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 때문이다. 물론 왼발을 헤아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나, 둘 ,셋. 법칙이 있다. 이 신호 이전의 신호를 성급히 건너거나 무시하고 건너 왔다면 이 다리 밑에서 백보 이상 오르막을 뛰어야 하고 맞춤해서 건너면 이십 보 정도를 뛰는 것이다.

오십 분이 지나면 중앙통의 한 약국 앞 길거리에 떡전을 펴는 할머니 앞을 지나게 된다. 오십삼 분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거기엔 이 시대 풍요의 상징인 지하공간이 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대가리'를 틀면, 야릇한 속옷을 수시로 바꿔 입는 마네킹 넷이 나를 맞는다.

그걸 흘끔거리며 지나면, 벤치가 있고, 그 벤치에는 자신이 노숙자이면서도 노숙자가 아닌 척 위장하는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신문을 펼쳐놓고 낱말 맞추기 퀴즈를 풀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이 나온다.

육십사 계단이다.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이 계단을 그냥 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엎어질 듯 뛰다시피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한 시간 십오분 정도가 걸린다.

물론 돌아올 때는 역순이다. 약 두 시간 가량 걸린다. 터벅터벅 걸으면 작정을 하고 걷는 것보다 시간도, 힘도 더 든다. 물론 신호등마다 신호를 지키고, 구경거리가 있으면 한눈도 팔다 보니 그렇게 되는 점도 있다. 거리는 약 7km, 왕복 14km 정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걷는다. 만으로 오개월 째다. 즐거운 일이다.

시건방

그래서 요즘 나는 걷는다는 것에 대해 겁이 없다. 좋아도 걷고, 싫어도 걷고, 바빠도 걷고, 한가해도 걷는다. 어디를 가야지 생각하면 차를 타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자동으로 걷는 것을 생각하고, 자동으로 발이 먼저 나간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좋고 시간도 빠르다. 정말이다. 걸어보면 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학교에 도착해 잠시 앉았다 일어나면 허리를 바로 펴지 못하고 엉덩이를 빼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야 했다. 뼈들이 '지멋대로' 노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젠 목적지에 도착해도 바로 옆방에 잠시 놀러온 것 같이 가뿐하다. 기분이 좋은 것이다. 웃긴다.

그래서 나는 그 외에도 수시로 걷는다, 시장을 걷고, 강변을 걷는다. 다리 위를 걷고, 모래사장을 걷는다. 그래서 더욱 만만하다. 부산도 우습고, 서울도 만만하다. '까짓것', 걷다가 보면 그까짓 것, 언젠가 도착을 할 테니까, 말이다.

어디엔들 가지 못하랴. 신의주? 중강진? 티베트? 길만 있다면 간다. 이대로 걸어간다면 천당도 지옥도 다 걸어서 갈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만만'하다. 어디냐? 목적지를 대라. 나는 걸어갈 것이다.

고수들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 자만할 것은 못된다. 제일 첫날, 두 시간을 작정하고 걸은 것이 한 시간 사십 분만에 도착을 했고, 다음날부턴 정말 엎어지듯 걷다 보니 일주일이 안 가서 드디어는 한 시간 오 분만에 주파를 했다. 그렇게 한동안 미친 듯이 걷다가 그것도 세월이라고 요즘에는 많이 여유로워져서 평균 한 시간 십 분에서 십오분 정도로 조절한다.

만족한다. 오로지 이 길을 나만이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가 고수들을 만났다.두 여자와 한 남자다. 여대생과 여고생과 직장인인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들은 가끔씩 중간 중간 내가 걷는 길에 나타나서 나와 함께 걷다가 제 갈 길로 사라진다. 남자 외엔 나보다 한 뼘은 작은 사람들이었다.

고백하건대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따라 붙었지만 나는 이들을 따라내지 못했다. 그 중에도 여고생은 걸을수록 점점 사이가 벌어졌다. 아니 콩만한 학생이, 이 무슨? 자그마한 아이가 무슨 발바닥에 모터를 달아놓은 것처럼 재발랐다. 입술을 앙 다물고 모든 것을 걷기로 승부하려는 것처럼. 아직 말을 붙여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

걷는다면

부연하지 않더라도 걷는다는 것은 인간 행동의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다. 거기다가 걷기는 성질을 많이 누그러뜨려준다. 특히 나 같이 급해 빠진 성질머리에는 아주 직방이다.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하지만 '푸히히' 나는 이 말을 들으면 부끄럽다. 몇 번이나 시도했던 달리기에서 두 달을 온전히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쉬다, 뛰다를 반복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가는 김에 걷고, 걷는 김에 걷는 것이다.

걷기로 생각을 했다면 목적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서두르지도 않아야 한다. 서두르면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그냥 마음 푹 놓고 걷다보면 제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만일 걷기로 작정을 하고, 한 발을 내딛었다면 이미 반은 성공한 것이다. 시작이 반 이니까. 목적지에 도착해 기쁨을 느껴보는 것도 중요하다. 걷기가 내게 주는 기쁨, 그러니까 근육이 발달하고 근력이 세지고, 거기다가 땀을 말리면서는 노동이 가져다주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이 아니라고? 노동이나 운동이나 사실은 그게 그거다. '푸히히'

걷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걷기 #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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