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딸 가진 부모는 죄인?

과다혼수·예단등 남성중심 혼례문화 여전... 예비신부들, 친정 찬밥신세에 눈물

등록 2007.09.03 13:45수정 2007.09.0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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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기자] "사회가 변했다고? 여전히 딸 가진 부모는 죄인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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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례허식 ⓒ 우먼타임스

호주제를 폐지하는 등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양성 평등 시대가 도래했다지만 결혼할 때 여성들은 뼈저리게 깨닫는다. 여전히 여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간소한 결혼 문화도 나타나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여전히 과다 혼수 문화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예비 신부들은 합리적으로 결혼을 준비하고 싶어도 간소화하지 못한다고 성토한다. 그 이유는 '시집을 가는' 만큼, 시댁에 밉보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괜히 예단이라도 생략했다가 눈 밖에 나면 평생 호된 시집살이를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남들 하는 만큼은 해갈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결혼식을 올린 정아무개(28)씨는 혼수 비용으로 총 10억원을 썼다.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 한 채와 모피코트, 전동 의자, 명품 가방 등을 포함한 예단과 5000만원 상당의 혼수를 장만해 갔다. 친정이 부유하기도 했지만 정씨는 "친정에서 하나뿐인 딸, 시댁에서 기 펴고 살라고 신경 써서 잘 해주셨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시댁은 '넘치게 받았다'는 반응이 아니라 '충분히 받았다'는 태도다.

예단은 현금이 대세다. 시댁 식구들에게 개별적으로 선물을 다 챙기기 힘든 점을 감안해 현금 예단에 초점을 맞추는 것. 현금을 건네지만 시어머니 명품 가방, 시아버지 양복, 이불 세트와 은수저 세트는 기본으로 들어간다.

예비 신부들은 부담스런 예단과 혼수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서운한 것이 '친정은 찬밥'이 되는 문화라고 성토했다.

지난 3월 결혼한 박수현(가명·30)씨는 2년 전 사법고시에 합격한 재원이지만 결혼 앞에선 무능력할 수밖에 없었다. 30년 동안 곱게 키워주신 친정어머니는 시댁에서 하나도 챙겨 받는 게 없는데 시댁 식구들에겐 명품 가방, 양장, 현금 예단 등을 해야 했기 때문. 박씨는 "딸 가진 부모가 죄인도 아닌데 이렇게 고개를 조아리고 잘 보여야 하는 것이냐"고 한탄했다.


소가족 시대의 도래로 아들 가진 부모들의 이른바 부의 세습 양상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며느리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 재산 상속을 전제하며, 순종적인 며느리가 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거나 시댁에 들어와 사는 것을 강요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

지난해 7월 결혼한 최미진(가명·32)씨는 현재 서울 방화동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시댁이 수십 억원에 이르는 부동산과 동산이 있는 재력가지만 집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최씨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 자신이 없어 버텼더니 시어머니가 '어디 두고 보자'는 식으로 대응해서 친정에서 보탠 4000만원을 더해 9000만 원짜리 오피스텔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며 "괜히 시댁에 밉보여서 고생하는 것 같다"고 후회했다.

사회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남성 중심의 결혼 문화를 사회 현상과 결부해 해석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황정미 연구원(사회학 박사)은 "데릴사위 제도가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긴 하지만 가족을 승계하는 방식은 여전히 남성 중심, 아들 중심"이라며 "부의 세습도 아들 중심으로 이어져 아들을 가진 부모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품없는 결혼하려면 공평하게 결혼준비해야

결혼 문화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예단, 예물, 이바지 등의 거품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평등 결혼 캠페인을 벌여온 서울여성의전화 등 여성 단체들은 평등한 결혼 생활을 위해선 공동 명의로 집을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와 예단이라는 식의 결혼 준비가 아니라 결혼 준비부터 결혼 이후 재산 관리까지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럴 경우 예단으로 빚어지는 갈등과 거기에서 파생하는 부작용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여성의전화가 지난 2003년부터 공모한 '평등 부부 및 부부 공동 명의 실천' 사례에 뽑힌 사람들은 부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결혼 비용을 충당하고 집 마련부터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절반씩 부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검소하게 준비해도 양가 부모가 이의를 달지 않아 허례허식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예비부부의 상당수가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어 양가의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지난 2005년 보건복지부가 결혼한 신혼부부 300여 쌍을 설문 조사한 결과 신혼부부 한 쌍이 결혼하는 데 쓰는 비용이 평균 1억3000만원. 이 중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것은 주택 마련 비용으로 평균 9000만원가량을 집을 얻는 데 썼고 나머지는 혼수와 예단을 위해 소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결혼 비용 출처로는 50% 이상의 응답자가 '부모에게 평균 7227만원을 지원받았다'고 답했다.

예비부부들을 위한 결혼 준비 학교를 운영하는 건강가정지원센터 관계자는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와 예단 하는 식으로 준비할 게 아니라 결혼 준비에 꼭 필요한 것들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방법을 권유하고 있다"며 "결혼 출발점 자체가 불공평하면 결혼 생활 내내 불평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4백만원대 이바지 음식…돈으로 가풍 따지기식

"네? 뭐라고요! 이바지 음식이 평균 300만원이라뇨. 호텔 뷔페도 아니고 말이에요."
"이바지 음식은 친정어머니가 시댁 식구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음식이에요. 대충 해 보냈다간 계속 말 나와요."

오는 11월 결혼을 앞둔 이아무개(30)씨는 이바지 음식 값을 알아보다가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서울 압구정에 있는 L업체는 170만원, 신촌에 있는 K업체는 110만원, 신사동에 있는 P업체는 400만원의 견적을 낸 것.

업체 관계자들은 "모둠 떡, 모둠 전, 갈비찜, 해물산적, 과일 세트, 술 일곱 가지가 기본 중 기본"이라며 "잘 해 가는 집은 10가지 이상 해 간다"고 강조했다. 시댁 식구들에게 친정어머니 솜씨를 선보이는 첫 자리인 만큼 간소하게 했다간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씨는 식구들과 음식을 먹는 데 몇 백만원을 쓰는 건 그야말로 돈 낭비라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기본이 400만원인데?" 하는 무안한 반응만 되돌아왔다. 이씨 친구 중 2명은 올해 초 결혼했고 이들은 모두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유명 한정식 집에서 이바지 음식을 맞췄다.

가격은 기본 7종 세트가 400여 만원. 이들이 일반 이바지 업체가 아닌 한정식 업체에서 맞춤 제작을 한 건 한눈에 보기에도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업체 홈페이지나 전화 상담을 통해 알아보면 지역별, 업체별로 같은 품목이라도 많게는 30만원 넘게 차이가 났다. 정말 많은 예비 신부들이 이바지 음식에 몇 백만원씩 들여 할 수밖에 없는지 이들이 말하는 강남 일대 이바지 음식 업체 4곳을 직접 방문해봤다.

"누구 소개로 오셨어요?"
이바지 음식을 알아보러 왔다고 하자 유명 한정식 업체 관계자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이 업체를 찾을 정도라면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소개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업체에서 이바지 음식을 했던 지인의 이름을 말하자 업체 관계자는 눈을 반짝이며 앨범 형식의 카탈로그를 보여줬다.

"기본은 하실 거죠? 그럼 모둠 떡과 약식 떡 63만원, 갈비찜 55만원, 갖은 전 50만원, 전복을 포함한 해물찜이 150만원, 도미찜 50만원, 국수 28만원, 밑반찬 85만원, 과일 28만원…. 대략 400만원 정도 하겠군요."
"이중에서 생략할 만한 것은 없나요? 모두 다 해야 하는 거예요?"
"굳이 생략한다면 국수랑 밑반찬 정도 생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더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생략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중상 수준은 된다는 압구정 Y업체도 가격 차이 외에는 다를 것이 없었다. Y업체가 제시한 가격은 150만원. 업체 대표는 "이바지 음식은 친정어머니와 이모들이 품을 많이 들여 마련해야 하는데 요즘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라 업체에서 대행한다"며 "신부 집안이 신랑 집안에 비해 처질수록, 예단이 부실할수록 고가의 이바지 음식을 주문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비 신부들은 이바지, 폐백 음식에 집착할까. 한 끼 밥값으로 지불하기엔 가격 부담이 큰 음식들을 왜 고집할까?

올해 3월 강남 유명 한정식 집에서 이바지 음식을 맞춘 최 모(29)씨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요약했다. 그는 "요즘은 친정어머니가 직접 이바지 음식을 하는 대신 이바지 전문 음식 업체에서 맞추는 것이 대세"라며 "요즘 시어머니들은 이바지 음식 업체 이름만 대면 대충 가격을 안다"고 말했다. 즉 이바지 음식 업체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인 만큼 싼 곳에서 했다가는 시댁을 우습게 아느냐는 뒷말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어 "친정어머니도 예로부터 이바지 음식은 친정어머니의 수준과 가풍을 가늠하는 음식인 만큼 어지간한 곳에선 하기 싫어 하셨다"고 덧붙였다.

올해 2월, 300만원짜리 이바지 음식을 한 신아무개(30)씨는 이바지 음식과 예단은 신부에게 '일종의 보험'이라고 말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처음에 예단, 이바지 음식 모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요. 근데 정말 제가 생략했으면 아마 지금 시집살이깨나 할걸요? 이바지 음식을 들여가던 날, 딱 음식 보자기를 푸시더니 '친정어머니가 신경 좀 쓰셨구나' 하시더라고요. 시어머니들끼리 서로 예단과 이바지 음식 정보를 나누기 때문에 간소하게 하거나 덜 해 가면 평생 피곤할 수 있어요."

시댁 식구 출신 지역 따라 기대하는 이바지 음식도 달라진다. 업체 관계자들은 이바지 음식을 다양하고 많이 신경 써서 준비하는 지역은 경상도라고 말했다. 이어 전라도, 강원도, 서울, 충청도순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시댁이 경상도이면 기본 세트인 일곱 가지 품목 외에도 해물산적, 편육, 장어구이, 구절판 등을 추가로 해야 한다고 한다. 모란떡, 두텁떡, 찰편, 한과, 갈비찜, 오색전, 구절판, 떨갈비, 대게 대하, 장어, 전복, 생선 해물찜 등을 모두 할 경우 가격은 500~800만원 선에 이른다.

폐백 음식 가격도 만만치 않다. 폐백 음식은 무조건 시아버지 고향 풍습에 맞추는 것이 예의다. 가격은 30만원부터 100만원까지 다양하다. 많은 예비 신부들이 결혼식장이나 웨딩 컨설팅 업체에서 추천하는 업체의 폐백 음식으로 정하지만 실제로 웬만큼 잘 산다는 집안은 이바지 음식만큼이나 폐백 음식에도 신경을 쓴다고 업체 관계자들은 귀띔했다.

집안 살림에 서툰 딸이 시집가서 행여 고생하지나 않을까 이런저런 음식을 장만해 보내줬던 이바지 음식, 하지만 지금 이바지 음식은 본래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얼마짜리 이바지 음식을 했는지, 어느 업체에서 했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화려한 이바지 음식 이면엔 딸은 '시집을 오는 것'이라는 시댁의 으름장과 예비 신부들의 시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먼 #여성 #혼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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