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정년을 되찾다

매운탕집으로 되찾은 정년

등록 2007.09.03 14:43수정 2007.09.0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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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직장에 다니던 고교 선배 중 한 사람이 평생을 몸바쳐 온 직장에서 쫓겨나다시피 명퇴를 했다. 그리고 나도 그즈음 내 의지에 의해 그 직장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2003년 어느 날이었으니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와 재취직 하고, 그 선배는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3층짜리 상가 건물을 사들여 곧바로 그 건물 1층에 매운탕집을 냈다. 그러나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는 개업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내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지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늦었지만 개업축하 인사차 전북 익산에 있는 음식점에 들렀을 때, 내 딴엔 서운한 마음에 알리지 않은 연유를 묻자 그 선배 대답이 걸작이다. 지인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란다.

세상에는 평소 전화 한 통 없다가 느닷없이 전화 걸려와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낸다고 초청장 보낼 주소 좀 알려 달라고 하는 넉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약삭빠르게 자기 잇속만 차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 장사를 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서야 어찌 약육강식의 전쟁터에서 살아날 수 있으랴.


한편으로 생각하면 세상사에 찌들지 않아 좋다는 생각이었지만, 저런 자세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하는 은근한 걱정이 앞섰다. 한마디로 경쟁력이 없다. 아니 자생력이 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 뒤로 자주는 아니지만 그곳에 내려갈 기회가 되면 꼭 그 집에 들러 식사하며, 옛 직장 이야기며 퇴직한 사람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길 나누곤 했었다.

 

어느덧, 그곳은 내게 지인들을 만나면 마음 편하게 식사 접대도 하고 주인 눈치 볼 것 없이 오랜 시간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들를 때마다 그 큰 홀에 손님이 있는 것을 거의 본 일이 없다. 걱정되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공자님 같은 말씀으로 천하태평이다.

 

가게 세가 안 나가는 내 집에서 종업원 없이 부부가 장사하니 걱정 없단다. 하루에 네 상만 팔면 된단다. 음식값이 한 상에 2~3만 원, 계산해 보니 하루 십만 원 매상이다. 이것저것 제하고도 한 달에 백만 원은 남으니 충분하단다.


나 원, 이렇게 한가한 계산법이 어디 있나. 돈을 벌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매운탕을 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자는 것인지 돈 냄새에 찌든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계산법이다. 사람이란 욕심이 많은 동물 이어 아흔아홉 섬 가지면 한 섬 채워 백 섬을 만들고 싶어지는 법인데, 속세를 떠나지 않고서도 정녕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장사를 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면 그 선배는 돈은 생각하지 않는단다. 다만, 정년퇴직하려 했던 직장에서 중도 하차했으니 못다 채운 정년에 맞춰 이 일을 하겠단다. 아마도 전 직장을 나오면서 자동으로 잃어버린 정년 때까지의 시간을 찾고 싶은 보상심리가 더 컸나 보다. 그것이 엊그제 일인데 벌써 3년이 지났다.

 

며칠 전 식사할 일이 있어 그곳에 들르니 간판을 내렸다. 개업한 지 딱 3년이 되는 날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증을 반납하고 폐업 신고를 했단다. 평소의 신념대로 정년까지 일했으니 원이 없고 이제 조용히 쉬면서 살고 싶단다.


그 이론으로 보면 당연한 말씀인데, 그러나 인간의 평균 수명은 고무줄처럼 늘어나 긴긴 날을 하릴없이 먹고 놀며 손가락이나 빨 수 없는 것 아닌가. 노는 게 얼마나 겁나는 일인지 한동안 놀아봐서 잘 알 것 같은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게의 문을 닫는다는 건 남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이는 들어가고 자꾸 여기저기 아픈 곳은 생겨나고, 고생한 만큼 매출도 시원치 않고.

 

IMF 이후 직장생활 그만두고 자영업 하여 성공한 사람 아직은 내 주위에서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든 하여 성공하는 사람이 많아야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텐데, 언제나 그런 날이 오려나 걱정도 해보지만 어쨌든, 실의에 빠지지 않고 실직의 아픔을 이겨내며 정년까지 일을 한 의지의 선배님께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2007.09.03 14:43 ⓒ 2007 OhmyNews
#정년 #매운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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