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각 지장보살님 어디 계세요?

[상해 항주 소주 남경 8박 9일의 여행기 7] 항주의 영은사

등록 2007.09.05 18:29수정 2007.09.05 18:49
0
원고료로 응원
7월 15일.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영은사로 향했다. 악비묘에서 k7번 버스를 타고 10분쯤 가니 영은사에 도착했다. 비가 오려는지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 들더니 바람이 불고 순식간에 날이 어두컴컴해졌다. 기후가 심상치 않아 관광이 될까 싶어 민박집으로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영은사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전혀 아랑곳없이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따라서 관광을 하기로 했다.

영은사 앞에는 해발 168.6미터에 비래봉(飛來峰) 혹은 영취봉(靈鷲峰)이라고 불리는 석회암 산봉우리가 있다. 이 산봉우리에는 오대(五代)부터 송, 원, 명나라에 걸쳐 345개에 이르는 진귀한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 중 오대 때에 조각한 서방삼성상(西方三聖像)과 남송 때의 포대화상(布袋和尙) 등과 같은 조각상은 모두 진귀한 조각 예술품이라고 한다. 조각상의 면면을 살펴보니 세련되거나 정교하다는 느낌보다는 아주 소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달마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입을 벌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유쾌해졌다. '삶이 뭐 별거냐 하하 허허 웃으면 그만이지' 라는 것만 같았다.

a

달마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입을 벌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유쾌해진다. ⓒ 조영님


산기슭에 용홍동(龍泓洞)이라는 동굴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동굴에 들어가려는데 겁 많은 아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겨우 들어갔으나 안 그래도 바깥 날씨가 어두컴컴하여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발광하는 카메라 플래시로 조각상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나왔다.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왼편 산기슭에 있는 조각상들을 보면서 영은사로 향하였다. 영은사는 동진 연간에 건축되었으니 1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찰 중의 하나이다.

영은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천왕전이 보였다. 그 위에는 운림선사(雲林禪寺)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것은 강희황제의 필적이라고 한다. 천왕사를 지나 대웅보전으로 갔다. 대전 중앙에는 높이 24.8미터에 달하는 석가모니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온 몸이 금으로 덮여 있다. 불상 앞에서 부처의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휘황한 금빛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전 안에는 양 옆으로 크고 작은 불상 150여 개가 늘어서 있었다.

a

영은사의 대웅보전 ⓒ 조영님


대웅보전을 나와 오백나한당(五百羅漢堂)에 들어서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한상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간단히 삼배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신라시대 때 당나라로 건너와 지장보살이 되었다고 하는 '김교각' 지장보살을 찾았다.


우리가 찾으려는 김교각 지장보살은 신라 때의 승려이다. 법호는 교각(喬覺)이며 신라의 왕자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24세에 입당하여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구화산에 정착한 후 그곳에 토굴을 짓고 불도를 닦다가 99세에 입적하였다.

입적할 당시 산이 흔들리고 조수가 비통하게 울었다고 한다. 스님은 항아리 안에서 불경을 읽으면서 열반에 들었는데 3년이 지난 뒤 항아리를 열어보니 육신이 썩지 않은 채 생전의 모습과 똑같았다고 한다.

그 뒤로 김교각 스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현신한 것으로 여겨져 현재 중국에서는 지장보살로 숭배하고 있다. 시선 이태백도 김교각 스님을 두고 "바다 같은 공덕 대를 이어 영원하리"라고 찬미하였다고 한다.

혹 한자로 김교각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을까 싶어 오백 나한상을 샅샅이 뒤졌으나 김교각 지장보살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한국인처럼 보이는 나한상을 찾았으나 그것도 역시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신라시대의 스님이 머나먼 항주에까지 와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는데 확인하지 않고 간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스님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역시 모른다는 것이다. 난감하였다.

a

오백나한당 이곳에 신라의 승려인 김교각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 조영님


이때 해외여행에 경험이 많은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한국인이 많이 있을 것이다. 혹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절대 당황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30분만 앉아 있으면 한국인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절 입구에 앉아 쉬면서 한국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앉은 지 10분이 되지 않아서 왁자하게 떠들며 들어오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두 팀이나 만났다. 세상 일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답사 내공이 점점 진화하고 있다는 뿌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조선족 가이드를 따라가면서 김교각 스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물으니 "왜 가이드도 없이 혼자 다니세요? 한국인 맞아요?"하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는 아주머니들도 우리 모자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참 대단하네요. 부러워요" 하였다. 그분들도 패키지 여행을 하지 않고 한 두 번만 자유 여행을 해 보면 대단할 것도 없고 그리 부러워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것이다. 

가이드를 따라 다시 오백나한당에 들어가서 보니 중앙에 모셔진 네 분의 보살 가운데 한 분이었다. 구화산에서 득도하였다는 사실만 기억하였더라면 금세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부귀공명을 훌훌 벗어던지고 머나먼 타국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처로 존경받고 있는 김교각 지장보살을 확인하고 나니 영은사를 제대로 답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a

오월시대에 건축되었다고 하는 석탑. ⓒ 조영님


대웅보전 앞에는 오월시대에 건축하였다고 하는 오래된 석탑이 아담하고 소박한 규모로 있었다. 이곳에서 지친 다리를 잠시 멈추고 아들과 함께 김교각 스님 이야기를 계속 했다.

"김교각 스님이 입적한 지 천 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금도 살아 있을 때처럼 손톱이 계속 자라나서 일년에 한 번씩 관 뚜껑을 열고 손톱을 깎는다"는 가이드의 말을 다시 전해 주었더니 아들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엉뚱한 질문을 자꾸 했다.  "스님이 천 년을 살았다고?", "손톱을 어떻게 깎는데?", "관이 무슨 뜻이야?"라고.

손톱 이야기는 어른인 내가 듣기에도 영험한 현상이라기보다는 괴기스런 일로 여겨지니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민박집으로 향했다.
#김교각 #신라 #왕자 #지장보살 #오백나한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